절차탁마

10.5 수업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10 12:07
조회
464
지난주에 이어 이번에도 3번째 고원을 다루었습니다.
3장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지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지층은 지질학적 지층자체이며 동시에 지질학적 지층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층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기도 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생물, 무생물은 물론이고 인간의 언어까지도─은 지질학적 지층이 형성되는 것과 동일한 매커니즘을 통해 지구라는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들이 말하는 지층화의 매커니즘은 무엇일까요? 지난주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그것은 ‘이중분절’입니다. 지질학적 지층으로 치면 퇴적작용과 습곡작용, 유기체의 경우에는 단백질 층위의 분절과 유전자 코드 층위의 분절, 사회체의 경우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분절을 이해하는 데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내용과 표현의 분절이었는데, 채운썜은 이것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가지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푸코는 신체형에서 감금형으로 이행되는 형벌체계의 변화를 분석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은 그것을 범죄와 관련한 담론이 합리적으로 진보한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때 범죄와 관련한 담론들은 형식이 되어 실제로 형벌이 집행되는 내용적 층위를 규정하는 형식이 되겠죠.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형벌체계의 내용적 측면이 변함에 따라 그 여파로 그와 관련된 담론이 변했다는 방식으로요. 아니면 양 측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푸코는 감옥체계와 범죄를 둘러싼 담론을 내용과 형식, 혹은 기의와 기표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습니다. 이것 각각은 서로에 대해서 독립적인 층위에 있습니다. 감옥은 범법행위에 대한 담론과 무관하게 건물, 죄수, 간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내용의 층위이지요. 또한 범죄와 관련한 담론은 감옥에 종속된, 혹은 감옥을 규정하는 기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자율적인 형식을 갖는 표현입니다. 범죄에 관련한 담론은 “죄를 평가하는 새로운 방식뿐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새로운 방식 역시 표현하기 때문이다.”(133) 형벌이 집행되고 죄수들이 수감되는 신체적인 층위와 그것에 대한 담론들이 형성되는 것은 항상 동시적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지층, 형벌체계를 구성하죠. 푸코는 이러한 이중분절의 분석을 통해서 단순히 형벌체계 안에만 귀속되는 것이 아닌, 규율권력이라는 하나의 추상기계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그것들(표현)은 다른 내용들과 다른 표현들과 함께, 기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표로 작용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동일한 상태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133)

추상기계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채운쌤은 계절이야말로 추상기계의 작동을 잘 보여준다고 하셨는데, 이때 계절을 언급하신 맥락은 계절이 변이를 내포한 항상성을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들뢰즈·가타리는 추상기계가 기표가 아닌 도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추상적인 기계는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며 고른판을 그리거나 지나가는 것”(141)이라고도 언급하고 있죠. 이런 설명들을 종합해볼 때 여러 지층들이 차이, 변이와 대립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내포한 채로 형성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 같은 것을 추상기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기표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척도도 없이 도표로 작용하는 추상적인 기계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읽고 강의 들은 부분 중 재밌었던 것은 지층화 자체가 탈지층화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손은 하나의 지층화를 나타내지만 그 자체로 앞발로부터의 탈영토화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땅에 붙어있던 앞발이 그 관계로부터 탈영토화 할 때 손이라는 형태의 재영토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진화 자체를 탈영토화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진화 자체가 일반화된 도주, 탈영토화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측면에서 볼 때 동물은 공격하는 자라기보다는 달아나는 자이다. 하지만 그 도주는 또한 정복이고 창조이다. 따라서 도주선들은 영토성 안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들이 현존함을 증언해주면서 영토성을 완전히 가로지른다.”(113)

탈영토화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으로 재영토화와 지층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입니다. 그러니까 탈영토화는 창조적인 힘인 것이죠. 이 구절에 대한 채운쌤의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위험이 닥칠 때 도주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주는 곧 자신을 수립해 온 것들로부터의 도주이기도 하겠죠. 이러한 방식으로 동물들은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합니다. 인간을 동물과 굳이 구분하자면 바로 이런 점에서 입니다. 인간은 위험이 닥칠 때 어떤 환상에 기대어 그 위험을 외면하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환경들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수립한 환경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무력함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채운쌤은 인간이 언젠가 훅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에도 항상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들의 침입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바이러스와의 끝도 없는 싸움을 하고 위기를 만날 때마다 자신을 바꾸지 않는 방식으로 그 위기를 무마하고자 노력하죠. 가령 환경 문제가 불거질 때 인간은 삶의 방식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대체 에너지나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환경보호’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타리는 생태학을 ‘감수성’을 바꾸는 문제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이라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차원은 없으며, 인간이 자연(이라고 분류되는 것)과 관계 맺는 방식은 인간이 사회기계와, 다른 인간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환경문제는 분명 인간에게 핵심적인 문제임이 틀림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유물론’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유물론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유물론은 어떤 본질적인 것도 상정하지 않을 때에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물질적 층위만 말한다고 유물론인 것은 아니지요. 담론적 층위를 물질적 층위가 규정한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본질주의가 될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적인 것이나 비물질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들 모두를 동일한 ‘기계권’ 안에 속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생명권이나 정신권은 없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하나의 동일한 <기계권>이 있을 따름이다.”(137)

들뢰즈·가타리에게 고정된 질서는 없습니다. 지층들 간의 교환과 소통이 있을 뿐, 고정된 지층도 지층화의 고정된 질서도 없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목적론이나 본질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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