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16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1-05 20:36
조회
350

지난 시간에는 여덟 번째 고원에서 세 개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후기는 건화군이 일찌감치 올려주었으니 저는 간략하게 떠올려보는 수준으로 정리할게요^_^


아시는 분도 있으실 텐데 저는 소설 읽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정작 내 일상에서는 시야의 한계 탓에 미처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는 것들을 눈여겨보게 되거든요.
일상에서라면 흠칫 놀라며 달아나버렸을 일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피해버렸을 사람들을 소설 안에서 마주하면서 그나마 이해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답니다.
말하자면 인간과 세계가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기묘하고 유동적인 것인지를 깨닫는 것, 그것이 저의 소설 읽기예요.


비슷한 이유로 들뢰즈+가타리는 단편소설을, 존재의 도주선이 그어지는 순간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설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단편소설을 그저 짧은 소설 정도로 여기지만, 사실 문제는 작품의 분량이 아니지요. 세상에는 단편소설 같은 장편소설도 많고, 장편소설과 구분되지 않는 단편 및 중편소설도 많거든요.
문제는 작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디에 멈춰 서 있는지라고 해야 할까요.
저자들에 따르면 단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지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인공은 뒤늦게 그 일이 뭔가 중대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지요. 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라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어쩌면 표면적으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뭔가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주인공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상황은 복구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고, 주인공은 오직 그 사실만을 알 뿐 딱히 방도를 알 수 없답니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와 <디알로그> 등 여러 책에서 피츠제럴드를 언급한 것을 이와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균열”(crack-up). 한 번 생긴 균열은 결코 메워질 수 없습니다. 피츠제럴드는 말하지요. 느닷없이 나는 깨닫게 된다, 모든 삶은 파괴의 과정임을.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이때 나오는 물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도주선을 그릴 가능성이 된답니다.
그러니까 저자들도, 채운쌤도 도주선이 좋다, 균열이 좋다, 이런 게 균열이다… 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게 도주선이고 어떤 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채운쌤 표현대로 어불성설이지요.
일어나버렸으나 알 수 없는 어떤 일, 그것이 새로운 도주선을 발명해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일 뿐.


물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도주선 같은 걸 그려야 하는데?
— 그려야 하는 당위는 물론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현상된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도주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말하자면 도주선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문제이지, 무슨 목적 같은 게 아닙니다.
여기서 이번 학기 첫 시간에 채운쌤이 하셨던 말씀을 상기해보면 좋겠지요.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실재론적 철학, 본질주의 철학이라고 했었죠.
그것은 존재를 點으로 간주합니다. 특정한 좌표를 부여받고 어딘가에 정박해 있는 게 존재라고, 존재들 사이의 관계란 점과 점 사이의 관계, 말하자면 선분과 같은 것이라고.
그에 대응해 <고원>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존재는 이미 線이다. 선은 다른 선과 만나면서 독특한 리듬을 생산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리듬의 변형을 통해 운동하고 무언가를 생성한다.
— 들뢰즈+가타리가 배치의 역동성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존재를 선적인 것으로 사유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리듬의 조성과 변환이지, 좌표계 안에 돌처럼 박힌 점들이 아니래요.


그런데 이 선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헨리 제임스, 피츠제럴드, 그리고 플뢰티오의 소설은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선들을 다루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설명이지요.
이 부분은 다들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언급만 하자면 그램분자적 선(절편성), 분자적 선, 그리고 도주선이 그것입니다.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일차적인 것은 도주선이지요. 도주선과 그램분자적 선 사이에서 분자적 선이 흘러 다닙니다.
관건은 그램분자적 선을 버리고 도주선을 따라 달리는 게 아닙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도주선에는 모델이 없다지요. 따라갈 수 있는 도주선이란 게 선험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
들뢰즈가 이전 책들에서 그렇게 예술에 대해 논한 이유가 여기 있겠습니다. 문제는 도주선의 재현이 아니라(이 말 자체가 모순!), 도주선의 창조.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에 매몰되지 않고 매번 도주선을 그리며 이동하기. 그러니까, 어떻게 내 삶을 창조할 것인가.


자, 바로 여기에 정치의 문제가 있다는 게 채운쌤의 설명이었지요. 내가 지각하고 욕망하는 방식, 그것이 곧 정치랍니다.
그러니까 정치제도와 국가 문제만이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나의 욕망, 나를 가로지르는 선, 내가 발명하는 새로운 선, 그 모든 것이 정치의 문제입니다.
온갖 좋다는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좋은 대학에 자녀를 보내고 싶은 욕망과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과 살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 나, 그게 내가 대면해야 할 정치적 문제입니다.
내 자본주의적 욕망을 제대로 대면하고자 하는가 아닌가, 여기에 나의 정치성이 다 드러나지요.
정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의 문제, 리듬의 문제, 욕망의 문제라는, 이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선언!


언뜻 보면 들뢰즈+가타리는 웬 판타지 같은 개념어들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가장 정치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저는 그게 아주 놀라워요. 어디 도망갈 구석이 없게 만드는, 이 놀라운 개념들.
이 개념들을 자기 연장으로 쓰라는 채운쌤의 당부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우리. ^^


자, 수업시간에 공지했다시피 다음 시간은 모처럼 방학입니다. 까르르~~~
이 꿀 같은 시간을 내가 무슨 짓으로 보내느냐, 여기에 우리의 정치성이 다 깃들여 있다는 생각으로다가, 부디,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다음 시간에는 9장 읽고 오심 되고요, 간식은 락쿤쌤+하동쌤이십니다.
다들 좋은 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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