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02 수업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03 14:46
조회
328
이번 주에는 8고원을 읽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8고원은 제목(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세 개의 단편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편소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입니다. 채운쌤은 이들이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개념으로 문학작품을 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주체도 계급도 아닌, 선으로 존재를 파악합니다. 선이 거부하는 것은 점과 선분입니다. 이때 들뢰즈·가타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어느 한 지점, 좌표 상의 위치를 지니는 점, 멈춰있는 점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잇는 선분으로 두 실재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 역시 거부합니다. 이들이 ‘선’을 통해 이미지화하는 것은 주체이전에, 구조 이전에 이미 흐르고 연결접속하며 리듬을 만들어 내는 어떤 운동성입니다. 그러니까 선으로 존재를 본다면, ‘존재의 운동’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동하는 것이 존재다’라는 말이 가능하겠지요.

채운쌤은 선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개의 그림들을 보여주셨는데요, 저는 Gie robert라는 아르브뤼 작가의 그림이 기억에 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의 형체들이 있는데, 그 안팎을 무수히 많은 선들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선은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윤곽을 한 것들을 통과해 지나갑니다. 세미나 때에도 나왔던 얘기지만 인간의 몸이 관(管)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마저도 선으로 이루어진 관을 관통하는 선들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것이 주체, 자아 같은 게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는 선 개념을 파울 클레로부터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클레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클레는 어떤 운동성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은 선들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역동적’이라고 하는 자세를 취한 사람, 혹은 움직이기 직전의 열차 이런 것들을 그리는 것은 운동성을 그림 안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운동성’이라는 표상을 옮기는 것에 불과하겠죠. 물체의 운동을 담은 연속사진에 남는 것은 선들이라고 합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선에 대한 사유는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 자체가 이미 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클레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선은 항상 다른 선들과의 관계에 따라서 정의됩니다. 선들의 관계는 커플의 관계가 아니라 분신의 관계입니다. 커플관계에서는 서로를 가르는 선에 의해, 너와 나, 남자와 여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등의 짝에 의해 각각의 주체화가 가능해집니다. 커플은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성립하죠. 그러나 분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신의 관계에서 타자는 나의 증식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작도 끝도 없는 이러저러한 행위들, ‘나’로 환원되지 않는 접속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할 때 미시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분할선, 분자적선, 도주선이 있다고 말합니다. “잘 결정되고 판이 잘 짜여진 영토들의 놀이 전체. 미래가 있을 뿐 생성은 없는” 견고한 분할선, 분할선과 도주선 사이를 방황하며 탈영토화의 양자들을 만들어내는 분자적 선, 그리고 끊임없이 영토를 이탈하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 도주선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체, 계급, 구조,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등이 아니라 이 세 개의 선들의 관계를 통해 정치를 이해합니다. 흔히 유일한 정치의 범주로 이해하는 거시 정치 역시 선들의 미시정치를 통과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채운쌤은 최순실 사태를 이야기하셨는데, 요약하자면 국가란 원래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시스템의 불합리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욕망들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박근혜를 뽑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합리적이라서 그를 지지했을까요? 그러다 불합리성을 발견하고 지지를 철회하는 중은 걸까요? 실은 그렇지 않겠죠. 박근혜에 대한 지지에도, 지금 폭발하고 있는 비난에도 이해관계나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미시적인 측면이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세 가지 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핵심은 몰적인 선과 도주선, 혹은 도주선과 나머지 선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도주선을 그리는 일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이것은 글쓰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채운쌤은 이들에게 쓰기는 곧 살기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글쓰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규정된 언어로 생각을 풀어내는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이때의 쓰기는 쓰는 행위를 통해 지각불가능한 삶과 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니체는 ‘회복기에 있는 사람만이 병의 감사함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한때 자기 자신이었던 것에 대해서 씁니다. 그러니까 그의 글쓰기는 계속해서 다른 영토로 이행중일 때 가능한 것이고 또한 이러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선의 배치를 보는 것은 나인채로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나를 떠나서도 불가능하겠죠. 이것은 계속적인 이행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이 ‘신중함의 기예’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저 머릿속에서 성립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나의 선들, 내가 만들고 고치는 지도들, 나의 기관 없는 몸체를 분석하는 것은 계속해서 사유의 실험을 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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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4 02:03
    선은 점과 선을 절단한 선분을 거절하지만, 선과 선이 교차되는 순간 점과 선분을 생산해내는 아이러니함이 있군요. (이렇게 생각해도 되나요?) 그런데 그 아이러니한 지점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가지게 되는 지점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결국 자아가 생기는 선들의 구조, 배치를 보는 것이 사유를 진전시키는 지점인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가능할런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