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청년 톡톡] ‘진심’(嗔心)을 바라보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1-16 14:10
조회
297
 

‘진심’(嗔心)을 바라보기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를 읽고


화에 대한 화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다가 집어 던졌어요.”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도대체가 빈틈도 없고 반박할 여지도 없어서 답답하다는 말씀이었다. 이 책은 왜 우리가 화와 증오에 휘둘리며 살아서는 안 되는지, 우리가 얼마나 편협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 어째서 그것이 무지이고 불필요한 일인지에 대해 아주아주 촘촘하고 치밀한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인내 수행을 할 기회를 주는 적들에게 화를 낼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들 없이는 수행도 없다. 그러므로 붓다를 존경하듯 적들과 중생들을 존경해야 한다! 이렇기에 책을 읽고 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말 없게 되는 것이 도리어 화가 난다고, 샘들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셨다. 모두가 웃으면서 공감했다.

따라 웃긴 했지만 그 순간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반응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책에 반감은커녕 오히려 반가움을 느꼈다. 한 구절 한 구절 ‘그렇지, 그렇지’하고 되뇌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너무나 옳은 이 논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말이다. 책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이렇게 의문 없이 받아들였던 내 태도가 이상하게 보였다. 이런 식의 과도한 동의는 무엇이었을까? 왜 나는 화와 증오가 우리를 망가뜨린다는 설명에 그토록 동감하고, 화를 내선 안 된다는 결론에 그토록 밑줄을 그어 놓았을까? 그런 적극적 동조 자체가 나의 상태를 비춰주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에 대한 괴로움, 화를 내는 나에 대한 괴로움이었다. 즉 나 자신의 ‘진심’(嗔心)을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그와 같이 완벽한 논리를 원했던 것이다. 그 갑갑함이 화와 증오가 유해하고, 화를 내서는 안 되며, 화를 품지 않는 방법을 말해줄 논증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욕구 때문에 쩔쩔매는 수행자가 더 명확하고 철저한 계율을 수단으로서 원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책의 탄탄한 논거가 답답하기는커녕 든든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화가 싫다. 누군가가 흥분에서 화를 터뜨리는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정당하건 부당하건 우선적으로 한심하고 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야는 좁고, 생각은 굳어 있으며, 사방으로 감정의 찌꺼기를 남긴다. “화나 증오가 강렬하게 일어나면 옳고 그른 것을 비롯해 장기적이거나 단기적인 결과를 판단하는 우리 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켜 버린다”(59쪽)는 달라이 라마의 말은 백번 옳다. 모든 화는 무지 속에서 타오른다. 화를 내는 것은 화나게 한 대상에게도, 화를 내는 사람 자신에게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일상적인 일을 해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과 사귀지도 않고, 화가 날 상황을 피하며, 화를 터뜨리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정작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내가 혐오하는 그 화가 내 마음속에서 계속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표출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 그것은 불씨처럼 열을 뿜는다. 오히려 터져나가지 않았기에 더 유독하게.

마음속의 진심. 내가 정말 혐오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분출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화는 분출된 분노와 다를 바 없이 몸과 마음을 흉하게 만든다. 머릿속엔 계속 그때의 말과 이미지가 리플레이 되고,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한다고, 그 사람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표상이 덧붙는다. 호흡은 짧아지고 심박이 빨라진다. 역시 다른 일에 지장을 준다. 내가 진심으로 참기 어렵고 벗어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진심’어린 동요 상태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부지런히 시도했다. 나가서 걸어도 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괜히 인터넷 쇼핑몰도 둘러보고. 그리고 최근에는 명상을 한다. 명상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거의 매일매일 꾸준히 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보다 조금 편안해진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이 방법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핵심은 주의를 돌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딴청을 피우는 것이었다. 명상도 역시 마음의 동요 자체가 아니라 호흡이나 다른 사물들에 집중함으로서 진심을 가라앉히는 일종의 임시처방 차원에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분명 효과는 좋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고 남아서, 기회가 왔다 하면 또다시 진심으로 피어났다. 뿌리를 숨긴 채 언제든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는 바로 이 진심이 나의 불구대천의 적이었다.



 

보면 사라진다고?

“화는 사실상 텅 비어 있어서 보면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 토론 자리에서 나를 또 의아하게 만든 말이었다. 여러모로 심각했던 나는 이 말을 받아 적다가 의문에 휩싸였다. 보면 사라진다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고 언뜻 문제 될 게 전혀 없는 가르침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경험이 매번 보여주는 것은 사실 그 반대가 아니던가? 물론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바라보면 진정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격한 흥분을 가라앉힌다고 해서 진심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지 않은가?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차분하게 앉아 바라보려 할수록 마음속의 진심은 더욱 뚱뚱해지고 질겨져서 돌아온다. 더 선명한 인과(바로 그 말 때문에!), 더 많은 심판(내가 옳아!), 더 많은 후회(참지 말았어야 해!)가 덧붙고 그것들이 그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화를 보려 할수록 녀석은 더 신나서 춤을 추고 나는 그 구덩이 속으로 계속 빠져들어 간다. 그런데도 바라봐야 한다고? 남도 죽이고 나도 죽이고 있는데? 이 끔찍한 메아리를 멈추기 위해서라도 바라볼 게 아니라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와 비슷한 한 청중이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그것을 계속 떠올리며 화를 내고 또 냅니다. 이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달라이 라마는, 늘 말하듯 우선 그 행동과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이 가진 장점들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행동에서 방금 말씀드린 장점들을 전혀 찾을 수 없다면,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을 잊어버리도록 노력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308쪽) 화를 바라보는 문제에서 내가 떠올렸던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려 해도 화가 거세지기만 할 때, “그때는 오히려 도망치는 것도 현명한 방법”(167쪽)이 아니겠는가. 최대한 주의를 돌려라! 부디 그것을 잊을 수 있도록, 그 되새김질을 멈출 수 있도록!

진심과 원한

이렇게 도망쳐온 것이 그동안 내가 해온 조치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 ‘현명한 줄행랑’은 상황은 모면하게 해 줄 수 있어도 힘을 키워주지는 못한 것 같다. 다음 순간 여전히 같은 패턴으로 진심이 일어난다면 도망침이 결과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더 많은 불씨들만 남겼는지도 모른다. 정작 내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많은 불씨들인데 말이다. 이것으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욕(忍辱)’의 근처에도 못 간다. “인내와 감내는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굳건함을 유지할 수 있는 심오한 힘에서 비롯한 강력함의 상징이다.”(42쪽)

사전을 찾아보니, 인욕은 단순히 참는 것만이 아니라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일’까지 포함한다고 나와 있다. 인욕이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상징이고 수동적 굴종이 아니라 “능동적인 대처”(19쪽)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니체는 불교가 원한을 없앴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때 원한(re-sentiment)이란 특정 대상에 대한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라 ‘다시 느낌’, 즉 느낌의 흔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어떤 기억된 정서와 고착된 대사방식이 되풀이되는 상태 전반을 말한다. 다시 말해 원한이란 ‘어떤 것이 이러이러해야 함’에 대한 집착에 갇혀 있는 상태다. 원한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자극에 새롭게 반응하지 못하며, 그의 사고방식에 가둬지지 않는 삶의 사건들은 그에게 불쾌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족의 느낌이 “화와 증오를 일으키는 땔감이다.”(79쪽) 즉 진심이라는 불은 이 원한을 연료 삼아 타오른다. 각인된 흔적에만 반응할 수 있음,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데에서의 무능력이 우리의 진심의 근원이다. 그러니까 원한도 남기지 않는 불교의 인내이란, 참는 것이지만 어떤 흔적도 찌꺼기도 잉여도 남기지 않고 참는 것이다. 어떤 비난도 우월의식도 가책도 마음속에 없다. 즉 불씨가 남아 있지 않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으며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당신, 진심입니까?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를 읽으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의 행위가 원래 그 사람의 본성이라면 그건 불이 뜨거운 것과 마찬가지므로 화낼 것이 없으며, 본능이 아니라 몇 가지 조건과 사정 속에서 그러했다면 하늘에 구름이 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 역시 화낼 것이 없다는 논리는 볼 때마다 놀랍다. 하지만 이 논리대로 마음이 움직이려면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논증을 기억할 수 있더라도 진심은 일어나고 그때는 계속 나나 타자에게서 ‘그러지도 않을 수 있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상태는 괴로움을 주고 나는 어서 증상을 완화시킬 방편들을 찾게 된다. 더 이상 이렇게 도망가지 않으려면 작은 것에서든 뭐라도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어쨌든 화라는 것에 등 돌리지 않고 바라보는 것일 텐데, 대체 불길을 키우지 않고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런 고민을 하며 지내던 중 감정명상도 배우고 이 책에 대한 세미나도 지나갔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바라본다’는 것 자체를 오해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를 바라본다는 것을 마치 화의 내용을 보는 것처럼 생각했다. 즉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따져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결과가 뻔했다. 이유를 찾다보면 내가 받은 부당한 대우가 부각되고, 거기서 반응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지금 이런 일로 마음속에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추해진다. 이런 방식의 원인 찾기 속에서는 화가 나게 한 대상, 그 말, 그 표정, 화가 난 나, 나의 태도, 나의 무능력이 모두 실체화된다. 그렇기에 진심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맹렬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감정명상에서 배운 ‘바라보기’는 그런 방식의 원인을 탐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화의 내용이 아니라 겉모양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시각명상을 할 때 대상의 의미나 속성이 아니라 형태와 색깔만 보듯이, 진심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기. 이런 바라보기는 우선 진심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한다.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당위 이전에 현재의 마음 상태가 화로 들떠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는 ‘화가 난 나’가 아니라 일어난 화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바라봄에 나에 대한 이미지가 끼어들어 망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정당화하거나 가책하기 전에 그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후에는 그 진심의 궤적들을 탐구해본다. 핵심은 화의 내용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거다. 그 상황을 곱씹는 것이 아니다. 진심의 겉모양, 즉 그것이 신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호흡은 거칠어지는지, 열이 뜨는지, 배가 갑갑한지, 머리가 계속 한가지 표상만을 소환하며 거기로 돌아가고 있는지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화라는 녀석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하나로 죽 이어지지 않고 그 강도가 거세졌다가 움츠러들었다가 하면서 변해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복통이나 두통이 계속 동일하게 아프지 않고 계속 그 세기를 달리하며 진행되듯이 말이다. 이렇게 화의 결들과 꼴들이 달라짐을 보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수준에서 ‘화는 실체가 없다’는 말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화가 사라지는 것도 불씨가 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운이 좋으면 완화될 수 있겠지만 또 금방 올라오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망가는 방법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 생각이 된다. 적어도 불길이 잦아드는 것을 등돌리지 않고 확인하는 것이니 말이다. 날뛰는 화의 경로와 효과를 바라보는 이 방법은 어려울 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다. 다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더 이상의 불씨를 만들지 않으면서 인욕을 연습하기.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상과제다.

글/ 민호

전체 4

  • 2020-11-16 16:12
    화에 대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주 읽고 있던 달라이라마의 <지혜 명상>에서 '공~'에 대해 많이 다루었던 문장들이 떠오르더군요.~^^

  • 2020-11-17 10:05
    힐링 서적들에서도 나름 딴청 피우는 여러 기술들을 소개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열 받는 현실이 해결되지는 않죠. 그런데도 그런 책들에서 말하는 기술과 불교가 말하는 기술의 근본적인 차이가 뭘까... 했는데, '모면'과 '인욕'에 있겠군요. 각인된 흔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끊어내는 결단이 인욕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실천이 도출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논의와 비슷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재밌군요.

  • 2020-11-17 12:45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원한, 망각, 배움 등이 키워드인 이번 니체 에세이와도 연결돼서 민호샘이 왜 원한을 깊이 따져보고 싶은지 이해되는 글이었어요. "어떤 사람의 행위가 원래 그 사람의 본성이라면 그건 불이 뜨거운 것과 마찬가지므로 화낼 것이 없으며, 본능이 아니라 몇 가지 조건과 사정 속에서 그러했다면 하늘에 구름이 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 역시 화낼 것이 없다" 이 문장은 진짜 놀라운 통찰이네요.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가능성의 문제를 니체 영원회귀와 함께 생각해봐도 좋겠다 싶고요. //아 그나저나 누구야 진짜. 민호샘 자꾸 화나게 하는 사람;;이름 좀 알려주세요. 제가 가서...$%@$#^@*$#

  • 2020-11-17 21:50
    나 자신의 ‘진심’(嗔心)을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그와 같이 완벽한 논리를 원했던 것이라는 자각이 놀랍습니다. 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활용한 논리의 돌파와 명상을 통해 마음을 길들이는 훈련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 같아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치밀한 논리는 책을 집어 던졌다 다시 주워오며 계속 곱씹어 봐야할 것 같죠! ㅎㅎ
    명상에선 일어나는 화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탐색하기 이전에 그 감정에게 '어서와~ 차 한잔 하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이걸 할 수 있기까지 제법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