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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법공양의 이유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1-25 21:17
조회
177

법공양의 이유


글 / 윤지


 

이때 제석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과 문수사리로부터 수많은 법문을 들었으나 이처럼 불가사의하고 자재신변하는 해탈법문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설한 뜻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만약 중생이 이렇게 설한 법문을 듣고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철저히 사무치고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해준다면 이러한 중생들이 훌륭한 법기가 되리라는 것은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 법문을 이치대로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것이겠습니까? 이 같은 중생은 모든 악도의 험한 길을 막아 버리고 모든 선도의 평탄한 길을 열어 젖혀서 늘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들을 볼 것입니다. 모든 외도의 갖가지 다른 논의를 굴복시킬 것이고, 일체의 포악한 마군을 꺾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마을이나 성읍, 국왕의 수도 중에서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뜻을 설명해 유통시키는 곳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저는 모든 권속을 데리고 법을 들으러 그곳에 가겠습니다. 아직 믿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믿게 하고, 이미 믿고 있는 자들은 법대로 보호하여 어떤 장애나 난관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마경」 251쪽)

제석천이 부처님의 설법에 깊이 감동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이해하고 외우고 마음에 사무치게 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언가에 깊이 감복하면 자연스레 그 마음을 주위에 나누고 싶어진다. 그래서 제석천도 기쁨에 겨워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처님! 이 지혜를 제 가족, 친지, 내가 거느린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게 아닌가.

불교에서는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찬탄하며 올리는 공양 중에서도 법공양을 최고라고 말한다. 내가 배운 지혜를 세상과 나누는 것이 이 지혜를 가르치신 부처님께도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깨달은 자들에게 중생이 올리는 향과 꽃과 음식, 아니 칠보로 만든 탑과 수미산을 통째로 공양한다고 한들 과연 그것이 그분들께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깨달은 자에겐 부족한 것도 필요한 것도 없다. 공양은 그것을 올리는 자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올리는 것이다. 물질적 공양을 받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공양을 한 자가 그 물질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의 가르침을 배운자에게 가장 귀한 것은 지혜 그 자체다. 그러므로 그가 이 지혜를 세상과 나눌 때 그것은 불단에 올리는 값진 보석보다도 훨씬 귀한 공양이 된다.

그러고보면 불교에서 배움이란 애초부터 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힌 것을 나누겠다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귀한 가르침을 전수하고 전수받기 전에, 일상에서 명상 수행을 하기 전에도 한결같이 이 귀한 배움을 얻고 수행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여기에 처음부터 고개가 끄덕여지냐면 그게 아니라는 거다. 지금 나 하나도 추스르기 힘든데 세상의 모든 중생을 위한다니 대체 무슨....? 이라는 마음이 올라온다. 늘 ‘나’로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나’와 나의 소유, 나의 것으로 귀결시키는 삶을 살아온 자에게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를 생각하라는 것은 뜬금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이런 마음에 0.00001이라도 익숙해지도록 매번 자신을 길들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 계속 듣고 새기면서 익숙하게 하다가 어느 날 그 이치를 문득 깨닫게 되는 작전이랄까?!



학계에 있는 동생에게서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수들은 자신의 제자들을 키우기도 하지만 제자가 학문적으로 성장해서 학회같은 데서 멋진 발표를 하거나 강의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제자에 대한 경계심을 품기도 한다고. 요즘 세상의 지식이란 내가 습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난 후 그것을 교환 가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가 어려서부터 경험한 지식의 습득이란 것도 누군가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경쟁의 구도 속에서 였으니. 지식을 얻고 외운다는 것은 그 지식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지식을 배우는 것이 즐겁고 여기서 기쁨을 발견해 세상과 나누고자 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여전히 그 지식이란 내가 획득한 내 소유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불교는 애초부터 이런 소유에 찬성하지 않는다. 법문 자체에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드러나 있고 (256쪽) 그 법문을 전수 받은 자를 통해 지혜가 세상으로 흘러간다.

또 다시 한 권의 경전을 읽었는데 우리는 이 지혜를 어떻게 자신을 통해 흘러가게 해야 할까? 기쁨에 겨워 나누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감히 내가....?’, 아직 온전히 다 이해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혹은 ‘좀 더 공부를 하고 충분히 익힌 다음에....’ 이런 마음이 더 많이 올라온다.

라훌라가 공부를 조금 하고 나자 부처님이 어린 라훌라를 밖으로 내보내며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오라고 시키셨다. 라훌라는 듣고 배울때는 그저 듣고 배웠을 뿐이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했을 때는 다시 여러번 곱씹어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면 좋을까, 저렇게 말하면 좋을까’ 깊이 숙고하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은 누구보다도 라훌라 자신에게 배움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수련하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배움을 익히고 나누는 과정. 법공양은 나눔이자 동시에 배움과 수행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하고 공양한다고 할 때 모든 중생에는 나도 포함되는 것이니 말이다.
전체 3

  • 2020-11-26 09:50
    "물질적 공양을 받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공양을 한 자가 그 물질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고의 공양은 법공양이다... 공부를 왜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되는 것 같네요.
    나로 시작해 나를 불리기 위한 배움은 어딘가가 꼬여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느 수준으로 소화되건 지혜를 흐르게 하기, 그리고 그런 마음 가짐으로 지혜를 배우기.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0-11-27 22:06
    법공양이 나눔이자 배움이자 수행이라는 말을 곱씹게 되네요. 나의 부족한 앎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수행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구요.
    공부가 흘러갈 수 있도록 공부하기, 지혜를 나누어주셨네요.

  • 2020-12-04 19:40
    공부하는 자로서 자신의 배움이 어떻게 법공양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