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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소화되지 않은 가르침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1-18 10:47
조회
213

소화되지 않은 가르침


글/현화


불교 경전을 읽고 공부하면서 깨달음과 진리에 대한 많은 가르침들을 접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부처’라고 하고, 실상이 곧 ‘진여’라고 하며, 청정한 불국토, 적멸과 같은 말들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지만, 사실 잘 와 닿지 않는다. 이런 것인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고, 어떤 특정한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과 멀어진다고 하고, 이해해서 생각으로는 붙잡을 수 없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제까지 들어 온 말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 걸려 있지만, 내 것도 아닌 말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뭔가 글로 표현하려니 늘 소화 불량에 걸린 것 같다. 내가 바로 ‘갖가지로 꾸미는 문자나 언구를 존중해서 믿고 즐기는 보살’(265쪽)이 아닌가도 싶다.

향적 여래의 세계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은 사람들의 몸에서 미묘한 향기가 나자, 아난다는 “이 미묘한 향기는 얼마나 오래 갑니까?”하고 묻는다. 그러자 유마힐은 음식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향기가 계속 남는다고 답한다. 여기서 향기 음식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표현으로 약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예컨대 세간에는 최상의 맛이라는 약 중의 왕이 있습니다. 만약 온갖 독이 온 몸에 퍼진 중생을 만나 그 약을 먹게 한다면, 그 독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는 이 약 중의 왕은 소화되지 않습니다. 모든 독이 다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소화됩니다. 이 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번뇌의 온갖 독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이 음식도 소화되지 않습니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 뒤에라야 비로소 소화됩니다.” (『유마경』, 시공사, 217쪽)

 



 

『법화경』에서 장자 아버지가 잘못해서 독을 먹고 죽어가는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 약을 쓰는 장면이 나오듯이, 이 약은 해탈로 이끄는 가르침의 비유이다. 약은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나 독이 제거되었다면 약이 그 기능을 다한 것이고 약의 기운도 소멸된다. 약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쓸 필요가 없고, 또 스스로 병이 들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쓸 수 없다. 약이란 드러난 현상만 보고 모든 것이 분리되어 따로 있다고 여기는 병에 걸린 사람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 없어서 분별망상으로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방편이다. 스스로 삶이 불만족하다고 여기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치유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 즉 발심을 한 사람들에게 유효한 약이다.

‘음식이 소화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진리의 말씀을 체화해서 마음에 아무런 번뇌가 없고, 삶에 장애가 사라졌다는 말일 것이다. 무명을 벗어난 지혜로운 사람은 나타나는 현상 그대로가 진실임을 알고 인연 따라 산다. 이 사실이 분명할 때까지는 방편의 약이 필요하다. 스스로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증세에 맞는 처방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약에 의지하고만 있다면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것은 아니다. 정말 건강하다는 것은 마음에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고 기대어 의지할 만한 관념과 주장이 없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들었던 말들, 공부하면서 들었던 모든 말들이 지금 이렇게 일어난 조작된 기억일 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권위의 말에 속고, 언제든 그 생각에 끌려갈 수 있다. 가르침의 말들은 공부를 해나가면서 서서히 소화되고 사라질 것이다. 언제까지? 깨달음에 대한 말이 더 이상 아무런 위력이 없어질 때라야 비로소 건강을 찾은 것이리라. 어느 누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분별 망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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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2 18:44
    소화불량이라 말씀하시지만 '발심'을 하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수행정진을 응원합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