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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수행, 불편함을 직시하는 것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03 09:41
조회
209

수행, 불편함을 직시하는 것


글 / 경아


또 선남자들아, 보살들은 늘 복덕의 자산을 쌓는 수행을 부지런히 하기 때문에 무위에 머물지 않는다. 늘 지혜의 자산을 부지런히 쌓기 때문에 유위를 다하지 않는다. 크나큰 사랑(大慈)을 성취해 어떤 결함도 없기 때문에 무위에 머물지 않는다. 크나큰 연민(大悲)을 성취해 어떤 결함도 없기 때문에 유위를 다하지도 않는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무위에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불법을 궁극에까지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에 유위를 다하지도 않는다. (『유마경』, 시공사, 제11품 보살의 수행, 226쪽)

“다함이 있고(有盡) 다함이 업는(無盡) 해탈법문”은 無爲에 머물지도 않고 有爲를 다하지도 않는 보살의 수행에 대한 법문이다. 유위를 다하지 않음은 생주이멸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여기 말고 다른 어떤 곳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위는 유위를 벗어난 세계이다. 유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무위에 머물지도 않으면 보살은 도대체 어디에 머물란 말인가?

보살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는 不二, 둘이 아니다. 무명이 중생의 세계이나 그 무명이 무명임을 아는 순간 유위가 무위의 세계가 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유위의 세계이나 그것이 무상하고 임시적인 것임을 아는 순간 무위의 세계가 된다. 그러니 유위와 무위는 별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문제이다. 무상하고 임시적인 허깨비 같은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유일한 세계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실체는 아니다. 공과 연기를 여실히 깨달은 보살이라도 그 허상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나와 대상이라는 분별을 통한 인식은 여전히 작동하며 희로애락의 감정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이런 분별하는 마음과 감정들이 지나가는 구름처럼 일시적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유위를 떠나 무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드러나는 것과 그것을 조건지우며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이 유위를 다하지도 않으면서 무위에 머물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유위를 떠나 무위에 안주하여 자신만의 해탈에 머무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부정일 뿐, 진정한 깨달음일 수 없다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이다.

공이고 연기이므로 무엇이든 나타날 수 있고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묘사한 대로 온갖 보화와 금빛으로 장엄한 모습이 바로 이 세계이다. 티끌 하나조차도 우주만물을 장엄하는 보석들이며 어느 것 하나 부정하거나 버릴 것 없는 세계이다. 보살은 크나큰 사랑인 大慈心을 성취해 무위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은 외부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기쁨과 같은 수동적 정서가 아니다. 크나큰 사랑은 어떤 이유나 목적, 의미를 들이댈 필요 없이 모든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이다. 보살은 존재들을 드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공과 연기를 자각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들을 긍정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어떤 것에 대해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질문은 그것을 긍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어떤 것을 드러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는 그런 질문을 무화시킨다. 바로 이것이 모든 존재에 대한 보살의 크나큰 사랑이고 유위에 머무는 것이다.

말대꾸하는 아이의 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화가 같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말대꾸로 생각하는 것과 화가 나는 것 모두 내가 원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버릇없이 놔두라는 것인가? 사실 버릇이라는 상식적인 기준도 애매하거니와 내가 생각하는 기준이 ‘옳다’라는 확신으로부터 화가 나는 것이다.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불편하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거기에 상식적인 훈육의 말을 덧붙일 것이 별로 없다. 무언가를 더 바라거나, 무언가를 후회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조건 지어진 상태가 바로 연기이고 공임을 안다면 부정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런데 어떤 상황과 대상 앞에서 불편해지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당황하는 것은, 여전히 나타는 것에 대한 부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아무것도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너무 수동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우리는 이미 마음으로 ‘너는 끝장이야!’라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처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러니 어떤 불편함이 밀려오면 마음으로라도 대상을 향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자신의 불편함을 직시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불편하다는 것은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른 것을 원한다 ’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를 갖춘 완벽한 분별작용이다. 분별작용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나, 우리가 분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 분별작용에 묶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불편함을 그냥 연기라고 말하고 넘어갈 때, 나 스스로의 분별작용을 놓치고 만다. 그 불편한 마음조차도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피하고자 하는 悲心이라는 점에서 부정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 불편함을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그 불편함을 밀어내는 부정이다. 불편함을 억지로 밀어냄으로써 기필코 그것을 부정해야할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동일한 반복으로 매번 그 불편한 마음만 올라올 뿐 그 근저에 자리 잡은 비심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불편한 마음들이 반복될 때마다 연기라고 넘어가는 것은 이전과 어떤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과연 내가 무엇을 부정하고 싶고, 무엇을 원하는지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솔직하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참견할 때 살짝 올라오는 짜증은 ‘이건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애매모호하고 미세한 감정 하나에 ‘나, 너, 옳고 그름’ 모두 작용하고 있다. 그러고도 이것을 어떻게 연기라고 두리뭉실하게 퉁치고 갈 수 있는가.

자비명상은 다섯 종류의 대상을 두고 연습한다. 자기 자신, 좋아하는 대상,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대상, 싫어하는 대상, 모든 중생. 마지막 단계인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명상은 불편한 마음이 별로 없다. 그런데 싫어하는 대상에 대한 자비명상은 일단 대상을 고르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어는 정도 싫어하는 대상을 골라야 명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부터 대상을 고르고도 집중도가 떨어진다. 모든 중생에 대해에서는 스스럼 없었는데 싫어하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명상은 왜 이리 안 되는 것일까? 그 싫어하는 사람도 ‘모든 중생’에 포함되는데 말이다. 내가 떠올렸던 ‘모든 중생’은 그냥 초록색 지구 같은 이미지였던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나 나를 짜증나게 하는 그런 류의 사람들은 소거된 청정한 이미지의 지구. 그런데 그런 ‘지구’란 없지 않은가. 불편하거나 뭔가 해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종적인 이유로 들이대는 연기법이 청정 지구의 이미지처럼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미지로서의 지구마냥 핑계로서의 연기법은 아무 것도 설명해내지도 생산해내지도 못한다. “모든 불법을 궁극에까지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에 유위를 다하지도 않는다.” 불법의 궁극을 성취한 보살이 연기를 들먹이면 별로일 것 같다. 공부 안 하는 애들이 맨날 공부해야한다고 말만 하는 것처럼. 중생과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옆집 보살이 유진무진 해탈법문을 성취한 보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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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7 10:57
    '다른 것을 원한다' 랃느가 '원하지 않는다'가 뚜렷한 언어분별이라는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분별은 연기' 하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는 부분에서 뼈가 많이 아픈...^^;;
    분별을 떠나기 위해서라도 그 떠오르는 분별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