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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애착이라는 이름의 무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03 09:50
조회
225

애착이라는 이름의 무지



글 / 호정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면 어두운 나락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그저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편안히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는 정도로 두려움의 강도가 약해졌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는 됐다는 것이다. 죽는 건 기정사실인데도 이 당연한 것을 인정씩이나 하는데 품이 많이 들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무상과 무아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죽음과 삶이 별개가 아니며 따라서 죽음은 삶의 중단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것도 같다.

‘살아있다면 누구에게나 죽음은 당연히 두려운 것’이라는 진리도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명들처럼 자연법칙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물 종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죽음이 특별히 두려울 것 같지는 않다. 죽음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좋은 것을 모두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사회의 삶의 양식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넓고 쾌적한 집에 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음. 과학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나고 몸을 개조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죽음은 더욱 두려운 것이 되었다.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은데, 죽음은 이 좋은 삶을 끝장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나의 느낌과 인식은 내가 속한 사회의 질서와 욕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조건에 의해 형성된 관념일 뿐이다.

모든 것이 연기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이 세상에 ‘나,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어디 있을까? 몸은 지수화풍의 사대가 합쳐진 것이다. 사대의 결합인 몸이 해체되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몸은 부패하고 분해되어 다시 여러 요소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나임을 주장하는 요체는 의식이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특성이란 업식의 다름에서 기인한다. 업식은 어디에서 오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내 조상들과 인류의 생존 양식이 내 행동의 경향성으로 드러난다. 그 경향성에 의한 나의 행이 또 업으로 저장된다. 나의 행은 경향성을 유지 강화할 수도 있고, 경향성을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내가 손에 쥔 것이 뜨거운 물건임을 알 때 손에 쥔 것을 놓게 된다. 고(苦)가 고(苦)임을 알 때 전환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엄마, 마음이 온통 바깥으로 향해서 남의 눈치만 보느라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엄마로 인해 수시로 화가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화는 엄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쿨한 엄마, 자립심 강한 엄마를 원하는 내 마음이 실제의 엄마를 하대하고 미워했다. 나에게는 잔소리 많은 엄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따뜻한 엄마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둘 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연기조건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이다. 엄마도 나 아닌 사람과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만났다면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희로애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연기조건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항상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有爲)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현상을 초월해 상주하는 고정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므로 변화와 차이를 거부한다. 그럼 변화하고 차이나는 것은 없다는 것인가? 세상 만물은 다 변화하는데 이것들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분명 현실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있다고 할 수 없다. 조건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생겨난 세계는 영원하지 않기에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순간순간 생멸하는 제법의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유위의 세계는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성이 없는 세계지만, 감각기관에 의해 그것을 현실로 경험하는 우리에게 그 세계는 단일한 불변의 세계로 여겨지기에 집착한다. 내 경험을 세계의 실상으로 등치시키는 무지다. 내 경험은 세계를 이해하는 수많은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삶에 대한 애착,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그것들을 모두 나로 삼거나 나의 것으로 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애착, 즉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상대에 대한 간섭으로 드러난다. 좋아하면 대상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가 어렵다.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그 자체는 집착이 아니다. 그렇다면 서원도 집착일 것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집착이고 괴로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를 미워한다. 이것이 집착이다. 살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는 어렵다. 다만 좋아하고 싫어할 만한 요소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업식에 의한 것임을 안다면, 좋아하는 대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 1

  • 2020-12-08 13:45
    호정샘!
    샘글 몆 년만에 읽어보네요
    연기의 조건, 자기업식으로 인한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시작으로
    자신의 성찰로까지
    생생한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