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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공생공락의 공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29 18:52
조회
200

공생공락convivial의 공부


글 / 경혜(비기너스)


지금까지 공부를 하면서 가지게 된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커다란 관계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오랜 습관이랄지 타고난 성향이랄지, 여전히 혼자인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럼에도 공부는 그리고 거기로부터 비롯한 인연들은 나를 개인주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세미나에서 “나는……”이라고 말할 때에도 그 ‘나’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관계 안에 존재하는 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되었다.

공부를 통해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 ‘관계’라는 키워드는 사실 일상 전반에서 문득 문득 떠오르기도 숨기도 한다. 가끔은 거의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 않다가도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써야 할 때는 아주 확고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공부’를 떠올리면 세트인양 ‘관계’가 떠오른다. 마치 ‘관계’가 (말로도 실천으로도)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 역할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사람은 물론 사물들, 내가 사는 동안 만나고 부딪히는 모든 곳은 마치 그물망처럼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정리하여 설명하기엔 아직 한참 모자란 나이기에 책과 자기윤리에 한정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책을 읽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 생각한다. 책은 읽는 이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가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평과는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은 지금을 다르게 보도록 한다. 책은 자명하다고 여기고 있던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도구이다. 예를 들어 이반 일리치가 작은 손공구와 동력 기계들, 그리고 제도까지를 모두 ‘도구’라고 일컫고 그것들이 우리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바탕 위에 놓인 도구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이 비단 책뿐만은 아니겠으나 함께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공통된 도구로서의 책은 필수이다. 이반 일리치를 함께 읽으며 우리는 12세기 수사의 책 읽기가 지금 우리들의 읽기와 얼마나 다른지 보게 되고 동시에 지금의 읽기가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읽기를 반추해 본다. 12세기 수사들에 비추어, 동학들에 비추어.

책과 관계라는 한계를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책을 연장통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이렇게 물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이 물음은 지금까지 책을 대했던 방식과 다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물음이다. 책을 대하는 지금까지의 방식과 다른 길을 내기 위한 조금 더 구체적인 물음이다.

책을 다르게 만나는 것과 더불어 나는 나 자신과도 다르게 만나는 길을 내고자 한다. 학습으로 배운 도덕 개념이나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지식으로 행위의 기준을 삼는 것과는 다른 길. 자기 삶을 가꾸고 조형하는 수련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의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자기 윤리로 나있는 길. 자기 윤리는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살아오고 살고자 했던 나를 다시 들여다 보게 만들었다.

공중 혹은 공공이 붙여진 도덕과 윤리는 규율적 인간이 내면화한 삶의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정상과 보통, 일반과 올바름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공공도덕과 윤리는 사회에 속한 개인들 스스로를 그 기준에 맞추어 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 기준에 맞추어 살고 있는지도 판단하게 만든다. 외부에 놓인 기준으로 나와 우리를 재단하는 규율적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윤리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일일까?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지식과 규율과 힘들의 관계 안에서 구성된 지금의 나를 들여다 보는 것이 자기 윤리를 만드는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가 지금까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를 공부하는 과정 안에 함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으로 만나고 만드는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며 말이다.



공부는 나에게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착하게 살자라거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근본적 지점에서 모든 것을 다시 들여다 보도록 만들었다. 이반 일리치는 타락한 인간을 치유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도구를 일컬어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convivial tools)라고 했다. 'convivial'이라는 말을 ‘거나하게 취하다’라는 뜻이 아닌 '함께(com-) 살다(vivial)'로 해석한 것이다.

사실 번역어인 ‘공생공락’은 그것이 담고 있는 뜻에 비해 상당히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새마을 운동 노래에 나왔던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나 ‘근면·자조·협동’과 비슷하게 말이다. 이반 일리치를 통해 듣지 않았더라면 관계를 맺는 다른 방법으로 공생공락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convivial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이반 일리치여서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나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공부가 나에게 발휘하는 힘이자 효과 가운데 하나는 공부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전체 2

  • 2021-01-01 17:09
    “ 공부는 나에게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착하게 살자라거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근본적 지점에서 모든 것을 다시 들여다 보도록 만들었다.”
    이 문장이 절절하게 다가오네요. 공부의 깊이나 역량을 측정하는 잣대는 관계뿐이라는 말도요. 제가 처음 뵈었을 때의 경혜샘이라면 절대 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 말이라 더 의미있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에세이를 쓰면서 제가 일리치나 푸코를 글자로만 읽고 있었다는 생각에 나름 반성을 했는데, 샘을 비롯한 비움 샘들 글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마음을 담아 눌러 쓴 느낌이 들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 2021-01-08 17:33
    비움쌤들과 비기너스 세미나를 처음 시작했던 시즌, 에세이 발표 때 경혜쌤이 코멘트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푸코나 일리치를 읽었으면 그 렌즈를 통해 논지를 펼쳐야지 함께 하지 않은 다른 자료를 끌어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씀. 살면서 별로 그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아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당혹스럽고..한마디로 자존심이 팍 상했죠. 그런데 공부의 정공법에 대해 일말의 연민없이 담백하게 일러주셨다는 생각이 들어 그후 죽 경혜샘의 그 코멘트를 새기려고 노력했답니다. 공생공락의 공부의 길이라는 것이 결국 다른 삶에 대한 실천이자 고민이 아닐끼, 저도 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