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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29 18:44
조회
262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


글 / 미현(비기너스)


“세상과 인류를 위해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 이반 일리치, <깨달음의 혁명>


일리치의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이 말은 아주 쉬워 보인다. 내 마음 하나로 세상에 대한 기여를 한다니 뭔가 즐거운 상상도 된다.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리 살아봐도 세상은 평등하지도 행복한 세상만도 아니다.

며칠 전 혜화동에 갔다가 어둑한 골목길에서 휴지통을 뒤지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어떤 물건을 찾으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여 분 뒤 다시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쓰레기 옆에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그런 사람이 아직도 풍요로운 서울에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현금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아들 집에 도착하자 마음이 켕겼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챙겨 다시 가보았다.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건 어쩌면 가던 길을 멈출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 가던 길을 멈춘다는 건 내가 다른 사람을 고정관념 없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타자의 외면뿐 아니라 내면을 보고자 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자리를 지나쳐가는 데는 내게 알 수 없는 불이익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내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은 아닐까.

일리치는 <깨달음의 혁명>에서 모두가 확신하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정관념이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내가 그 제도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 내 ‘영혼이 고사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내 상상력이 갇힌 틀을 깨는 것이다. 내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참 허접하다. 내게 남는 잔돈을 준다거나 먹을 것을 준다거나. 그외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리치는 “환상에 현혹되기보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기술에 안주하기보다는 변화를 살아내자고”(깨달음의 혁명. 19)라고 하면서, 우리를 ‘깨달음의 혁명’으로 초대한다. 그는 “우리 가운데 온전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우리가 온 힘을 다해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합니다”(깨달음의 혁명. 21)라고 말한다. 그러려면 우선 산업사회의 구조 때문에 “자기실현의 길이 심각하게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깨달음의 혁명. 21) 한다. 이 산업사회의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진보”라는 개념이다.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증대와 시간 절약을 통해 최대 능률과 이윤에 이르는 원리”, 그게 우리가 말하는 진보다.(깨달음의 혁명. 13)

나는 “진보”라는 개념이 새로운 세상을 향하는 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일리치가 말하는 “진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행을 베풀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남아메리카에 “빈곤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벌이는 끔찍한 전쟁”깨달음의 혁명. 27.이었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부정 위에 세워지는 ‘빈곤을 퇴치한다’는 명분은, 일리치가 보기에 그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단어는 내게 타자의 외면에 상처를 입히는 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일리치의 글을 보니, 내가 하고자 했던 얄팍한 ‘선행’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타자의 능력을 빼앗는 일, 그러니까 타자의 내면에 폭력을 행사하는 일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안에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선행’이라는 ‘차가운 우월감’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공부의 즐거움을 자주 말하는 일도 ‘친절한 호의 뒤에 숨은 오만함’(깨달음의 혁명. 61)은 아니었을까.

나는 내 즐거움인 공부를 사람들과 함께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었다. ‘비움’에서와 같이,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어디 아프다는 말 대신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 대신에, 어디를 성형하자는 말 대신에..., 여기에 다른 좋은 삶이 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보다는 공부하는 삶만이 좋은 삶이라는 고정관념을 공부하는 양만큼 늘려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게서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며, 요즘 나는 모두 같이 행복한 노후를 꿈꾼다는 것도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요 환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내 두려움이 아닐까. 그 두려움을 견뎌내 보고자 공부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아닐까. 공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과정이라고 볼 때, 공부를 강요하는 내 행동 역시 선행이 아니라 폭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돌이키는 일’에 대해 일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의 말뿐만이 아니라 그의 침묵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소리를 통해서만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시키려면 말을 멈추는 순간에도 의미가 전달됩니다.”(깨달음의 혁명. 64) 이런 침묵을 나는 실천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몸과 마음의 편안한 상태가 유지될 때는 가능한 듯이 보이다가도, “말만 알고 그 사이에 있는 침묵을 알지 못하는 언어”(깨달음의 혁명. 64.) 를 사용하게 될 때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도 상처를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킨다는 일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쉼 없는 공부다. 그 안에서 내가 가진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그것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라 생각해 본다.

전체 4

  • 2021-01-01 17:14
    샘 스스로의 ‘당연함’에 대해 차분하고도 힘있게 의문을 제기하시는 과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글이네요. 이 글을 읽는 동안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질문할 줄 아는 분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 2021-01-06 09:56
    건화형 말대로, 스스로 질문할 줄 아는 분들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멋지네요!
    자신의 선행을 되묻기, 자신의 옳음과 변하지 않는 관념들을 되묻기. 그런 작업으로서의 쉼 없는 공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미현샘!!

  • 2021-01-07 09:25
    미현샘이 그동안 공부오면서 겪었을 부침과 성찰이 글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일상적으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풍경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이끌어내는 관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의 일환이라고 생각해봤을 때 미현샘의 글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참 성실하게 차근차근 자신의 속도에 맞춰 공부해오셨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

  • 2021-01-08 17:10
    요즘 드는 생각이예요. 진짜 멋있는 것은 나이들어 공부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은근슬쩍 온갖 합리화를 해가며 공부를 놓게 될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살아본 우리들은 너무도 실감하잖아요. 그런데 공부자리에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새롭게 알고 깨지고 자존심에 멍이 드는 일을 경험한다는 게 보통 복 갖고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요. 저 밑바닥에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늘 앞서기 때문에 좌충우돌 반신반의하면서도 몸이 공부의 자리에 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서로 부축해주며 공부해요~~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