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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 미셸 푸코의 철학 <2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3-16 19:35
조회
236
이번 주에는 ‘문학’이라는 키워드로 푸코와 만나보았습니다.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등의 푸코 초기저작은 문학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푸코의 문학론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을 통해 드러나는 푸코의 문학론은 ‘광기’와 분리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푸코가 보기에 문학이란, 나아가 글쓰기란 근본적으로 광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광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보자면, 푸코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광기’라는 개념을 실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광기는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생성을 겪으며 새롭게 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전제 속에서 푸코는 근대적 광기의 개념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질문합니다. 이것을 질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전 시대의 광기 개념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겠죠. 르네상스 시대로 되돌아간 푸코가 발견한 것은 그 당시에 광기는 이성에 대립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성과 광기의 관계는 몽테뉴와 타소의 만남으로 상징됩니다. ‘어떤 것도 믿지 말라’라는 신념을 가진 이성의 화신 몽테뉴는 미쳐버린 이탈리아 시인 타소를 만나러 갑니다. 둘의 만남은 플루리 프랑수아 리차드라는 작가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고 하죠.



그런데 푸코는 이때 몽테뉴가 타소를 보고 연민이 아닌 감탄에 젖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몽테뉴가 정신착란 상태의 타소를 찾아갔을 때 느낀 감정은 연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분한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감탄에 젖는다. 아마 이성이 극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성이 가장 깊은 광기와 한없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모멸감이 일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이 유쾌하게 고양되는 광기와 특별하고 지고한 미덕의 과시적 표현이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가깝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 이성의 노력이 광기에 의해 확인되는 것은 광기가 이미 그러한 노력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이미지, 맹렬한 정념, 정신의 그 위대한 침잠은 실로 광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서, 가장 날카롭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이성의 도구이다. (…) ‘광기가 섞여 있지 않은 위대한 정신은 없다 … 바로 이러한 점에서 현자들과 가장 정직한 시인들은 때때로 이성을 잃고 격정의 상태에 빠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광기의 역사>, 96~97, 채운샘 강의안 재인용)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광기는 감금해야할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광인은 삶의 비의를 담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성은 광기를 포함하거나, 혹은 그것과 이미 닿아있는 어떤 것이었다는 거죠. 광기과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것은 데카르트 이후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이성으로부터 광기를 배제했죠. 데카르트 이후 유럽에서는 비이성의 영역에 대한 단죄가 시작됩니다. ‘대 감금의 시대’. 광인들, 홈리스, 독신자, 헛소리 하는 자 등등을 모두 가두어버리기 시작한 것이죠.
이때 등장한 집단이 리베르탱(libertin)이라고 합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주로 사용된 리베르탱이라는 말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비이성을 행하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사회적 담론의 영역을 갖지 못했는데, 이들의 언어를 드러낸 것이 바로 사드라고 합니다. 사드는 대부분의 작품을 감옥에서 집필했는데요. 그는 푸코의 문학론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라고 합니다. 푸코는 질문합니다. ‘사드는 왜, 무엇을 썼을까?’ 사드는 감옥에서 버려진 종잇조각에 빼곡히 자신의 소설을 적어내려갔습니다. 그는 비좁은 지면 위에 17세기를 대표하는 합리적 언어로 그 세기가 배제한 가장 동물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을 묘사했다고 합니다. ‘성性’. 섹스는 인간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거기에다 온갖 표상을 갖다 붙입니다. 아름다운 표상을 덧붙이는 것은 매번 자신이 마주하는 비인간성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죠. 사드는 외설적인 어떤 것을 쓰고자 했다기보다는 인간이 배제한 스스로의 비인간성, 삶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가시화하고자 했던 것이겠죠.
푸코는 조르주 바타유나 모리스 블랑쇼와 같은 선배 비평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이 ‘위반’(바타유), ‘바깥’(블랑쇼)등의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문학이 어떤 한계체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한계체험이란 우리 안에 내재한 타자성과 마주하는 경험을 말합니다. 문학이란, 글쓰기란 바로 이러한 합리적 담론이 배제한 영역과의 만남으로부터 촉발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합리적인 공동체나 담론은 항상 그 자신이 끌어안지 못하는 바깥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됩니다. 합리적 담론은 스스로 배제한 광기, 이방인, 비인간성을 관리하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며 감시하는 방식으로 바깥을 내면화하며 작동합니다. 자신의 합리성을 가장 확신하는 담론은 사실 끌어안을 수 없는 것들의 타자성을 가장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체는 형상의 투명한 명료성은 무엇인가를 계시하는 동시에 은폐한다고 말했는데(『비극의 탄생』), 이때 니체가 말하고자한 것이 바로 이러한 지점이 아니었을까요? 합리적 담론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과 광기를 가르는 경계선을 만드는데, 문학은 바로 그러한 경계를 의문에 붙인다는 것이 블랑쇼를 비롯한 푸코가 영향을 받은 비평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소설은 근대적 제도로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근대적 제도로 형성된 소설은 법의 바깥과 합리적 언어의 한계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할 만한, 비범한 인간을 그렸고, 그때 사용되는 언어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언어는 의식의 거울로 여겨졌다고 하죠. 그러나 광기를 완전히 시야 바깥으로 배제하고, 과학적 담론으로 설명해내고, 이성과 분리시킨 근대의 명료성은 반대로 법에 의해 외부로 내몰린 자, 합리적 정신에 의해 배제된 비인간성을 포착하게 하고, 합리적 담론의 영역의 지반이 되는 언어 자체의 한계를 마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 정신으로 무장한 근대와 함께 성립한 문학은 합리적 담론 안에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언어화하는 일을 사명으로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해야 하고, 어떤 공통된 지반 위에 배제된 것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작가는 가장 예리한 정신성을 지녀야 하는 한편 합리성의 영역 바깥에서의 착란의 경험을 반복해야 합니다. 채운쌤은 이러한 예술은 지시대상을 갖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예술가가 나무를 그렸다면, 보여진 것(나무)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의 너머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사드의 언어를 이야기하며 이러한 ‘너머’를 ‘부재와 빈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드의 지칠 줄 모르는 언어 이후로, 그것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언어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우리의 말 아래에 하나의 빔(空)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앞서 확인했고 우리가 16세기에 들었던 디오니소스적 일치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조용하며, 훨씬 더 귀먹은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부재와 빈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말해지는 언어입니다.”(<문학의 고고학>)

언어와 지시대상이 확실하고 견고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동일자들 사이의 공통의 지반이 성립하는 동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시대상을 갖지 않는 빈 세계로부터 출발하는 언어는 공통의 지반 바깥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설명은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단순한 ‘생각’의 차원에 머무는 어떤 것이 아닌,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은 항상 이러한 ‘빈 세계’와의 마주침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합리성의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합리적 정신이 무엇을 합리적인 것으로 구성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 것이죠. 푸코의 철학은 우리가 결코 묻지 않는 바로 이것, 합리성의 조건을 묻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푸코의 철학에만 고유한 것은 아닐겁니다. 모든 사유함은 어떤 방식으로든 합리성의 한계와의 마주침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무엇보다 사유는 우리가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는 합리성의 한계에 부딪치는 일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수립하고 있는 합리성이나 인간성을 흔드는, 사유를 촉발시키는 폭력적인 사건과 어떻게 마주칠 수 있을까요? 어제 절차탁마 들뢰즈 강의에서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우하는 것,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다. 단, 긴 시간에 걸쳐 준비하는 것 이외에, 발견하기 위한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깥과의 마주침 없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사유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마주침이 항상 사유를 구성하게끔 하는 것도 아니지요.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 아마도 우리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기다림은 "만남 그 자체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다음주 간식은 조미형 선생님과 공혜경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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