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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 미셸 푸코의 철학 <3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3-23 14:19
조회
258
1. 연극과 철학

이번 주에는 ‘보여진 것’과 ‘말해진 것’이라는 키워드로 푸코를 만나 보았습니다. 물론 푸코가 말해진 것과 보여진 것 자체에 몰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해진 것과 보여진 것을 통해서 말해지지 않은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에 이르고자 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일 것 같습니다. 푸코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말해진 것이 전부인가?”.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말하는가?”, “어떤 조건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출현하는가?”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들을 실체화 시키고 그 안에만 머문다면 철학은 시작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해지고 이렇게 보여지는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철학보다는 앙케이트나 통계 같은 것들이 유효하겠죠. 혹은 완전히 반대로 보여진 것과 말해진 것의 너머를 실체화 시킨다면 그때에도 사유는 정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신이나 내세에 대한 기독교적 관념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움켜쥐려는 모든 철학들 또한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푸코는 어떻게 하면 현상을 실체화시키지 않고 또 현상의 배후를 실체화시키지도 않은 채로 사유를 지속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문제의식은 들뢰즈의 『의미와 논리』와 『차이와 반복』에 대해 푸코가 쓴 서문에서 잘 드러난다고 하는데요, 거기에서 푸코는 자신의 관심이 변하지 않는 것에 있지 않고 ‘사건’에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 외견의 빛의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건’입니다.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 이 두 가지 물음은 전통적인 철학적 물음인 ‘영혼이란 무엇인가?’ 혹은 ‘영원이란 무엇인가?’와는 전혀 다릅니다. ‘현재시의 철학’이자 ‘사건’의 철학인 이 철학은 연극이 대상으로 삼고 있던 것을 철학의 시각에서 되묻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연극은 늘 ‘사건’을 다루고 있고, 게다가 연극의 역설은 바로 이 ‘사건’이 반복된다는 점에 있었지요.”

플라톤은 연극(비극)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취향을 함양하는 데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의 이중적인 모습이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 신들이 야기한 안 좋은 결과들을 모두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렇게 주장한 것은 비극작가를 꿈꾸기도 했던 플라톤 자신이 극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극은 사건을 다룹니다. 극은 대본의 재현도 아니고, 연출가의 의도의 재현도 아닐 것입니다. 극은 매번의 상연이라는 사건으로 존재합니다. 날씨, 배우들의 컨디션, 조명의 세기, 그날의 관객들 등등 무수한 변수들 자체가 그날의 극을 성립시킵니다. 구체적 시공간을 제외한 극은 없습니다. 그러나 극은 항상 그 모든 변수들을 포함한 채로 반복됩니다. “사람이 상연하는 한 그것은 매일 밤 반복될 것이고, 그 반복이 계속되는 한 끝없는 시간 속에서, 이미 있었던 현실의, 혹은 허구의 사건이 반복 됩니다.”

푸코는 바로 이러한 연극의 방식으로 세계에 물음을 던집니다. 그는 병, 광기, 범죄의 본질, 그러한 것들의 정의를 묻지 않습니다. 매번의 사건으로 존재할 뿐인 그러한 것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병, 광기, 범죄를 무대에 올립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변수를 포함한 채로 반복적으로 상연되겠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대 위에 올린 것들을 보고 무대 위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무대에 올려진 것들을 통해서 무대 자체에 접근하는 것, 매번의 구체적 상연 속에서 반복의 조건을 묻는 것이 푸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마네와 마그리트, 가시성과 언표가능성

“하나의 ‘시대’는 자신을 표현해주는 언표들 그리고 자신을 채워주는 가시성들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의 본질적 두 측면은 다음과 같다 : 한편으로 각각의 지층들 및 역사적 형성들은 그 자신에 적용하는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재분배를 함축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옮겨가는 과정에는 가시성 자체의 양상 변화와 언표가능성 자체의 체제 변화가 생겨나기 때문에 재분배의 변이가 나타나게 된다. (…) 각각의 지층들은 말하는 방식과 보는 방식, 담론성들과 명증성들이라는 두 요소들의 조합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하나의 지층으로 옮겨가는 과정에는 위의 요소들 및 그것들 사이의 조합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푸코가 ‘역사’에 기대한 것은 각각의 시대에 있어 가시적인 것들 및 언표 가능한 것들에 대한 이러한 결정과정이다.”(질 들뢰즈, <푸코>)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말하고 싶은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일까요? 들뢰즈가 푸코의 사유를 빌려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지층 속에서, 그러한 지층이 함축하고 있는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재분배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말합니다. 투명한 시선도 투명한 언어도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어항 안의 물고기에게 투명한 어항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푸코는 말해진 것들과 보여진 것들의 분석을 통해서 이것들을 분배한 조건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푸코의 관심은 가시적인 것들 및 언표 가능한 것들에 대한 결정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선생님께서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강의를 진행하셨는데요(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푸코 강의인지, 마네 강의 인지 혼란이…), 주로 마네의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푸코가 마네에 관한 많은 강연을 했고, 마네의 그림을 특별히 의미화했기 때문이죠. 마네는 말하자면 회화 안에서 회화의 조건을 문제삼은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마네를 “서구 미술에서 적어도 르네상스 이후, 적어도 초기 르네상스 이후 처음으로 소위 자신의 그림 안에서, 그림이 재현하는 바 내에서 화가가 그리는 공간의 물질적 속성들을 과감히 이용하고 작동시킨 화가”라고 평하면서 마네의 작업을 “그림에 재현된 바 안에서 서구 회화의 전통이 그때까지 숨기고 피해 가려 했던 캔버스의 속성, 특질, 한계가 다시 튀어나오게 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기존의 서구미술은 회화가 2차원이라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투시도법적으로 완벽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캔버스, 네모, 흰 바탕, 물감, 그것을 비추는 빛 등 회화를 구성하는 조건들을 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안에 그려진 것의 내용을 파악하죠. 그런데 마네는 시각적 관습을 위반하면서 그림의 내용이 아닌, ‘그림’자체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뒤쪽으로 뻗어나가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기이한 구도를 세우고, 광원을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은폐되었던 캔버스를 인식하게 만들거나, 그림을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감상자의 위치를 무너뜨립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최근에 뜬금없이 화제가 된 <올랭피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채운쌤은 이 그림을 티치아노의 작품과 비교하셨는데, 티치아노와 마네의 작품 모두에서 모델은 보여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티치아노의 모델의 경우에는 보여질 준비가 된(?) 자세로 관객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여기서 감상자는 발가벗은 여인이 아니라 미라는 관념, ‘비너스’를 봅니다. 이에 비해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모델은 감상자를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감상자는 보는 자인 동시에 보여지는 자가 됩니다. 이러한 보는 자의 고정된 위치가 완벽하게 무너지는 작품은 <폴리 베르제르 바>였죠. 이 작품에서 우리는 도저히 조망하는 자의 위치를 확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마네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말과 사물>의 서문으로 삽입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그 자신의 분석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마네에게서 재현을 가능하는 초월적인 관객의 시선이 무너졌다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우리는 관객의 자리와 왕의 자리, 화가의 자리가 동일시되며(작품 안의 방 뒤쪽의 거울에 모습을 드러내는 왕은 관객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작품의 질서를 부여하는 지고한 조망자의 자리로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푸코는 여기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와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유추해 냅니다. 벨라스케스와 마네의 회화 안에 나타나는 차이는 완벽한 재현의 세계인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와 그러한 체계에 균열이 생긴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강의 말미에 채운쌤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을 보여주셨는데, 거기에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푸코는 이것을 담론의 차원과 가시적 영역의 차원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읽어냈습니다. 마네가 회화 안에서 재현가능성과 초월적인 관람자의 위치를 문제삼았다면 마그리트는 언어와 가시적 영역의 관계의 불확정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마그리트의 작품을 모순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어떤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의 견고한 관계라는 전제가 필요하죠. 마그리트는 그러한 전제를 비틀면서 담론적 영역과 가시적 영역의 미묘한 어긋남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반대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에는 담론의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하며, 반대로 무언가를 말할 때는 보이는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각각 독립적인 두 영역을 연결하고 투명하게 매개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권력 혹은 배치일 것입니다. 담론의 영역과 가시성의 영역을 매개하는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 앞으로 있을 강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7-03-23 15:46
    강의에서 굳이 푸코가 강의한 열 세 점의 마네 그림을 다룬 건, 언표와 가시성이라는 두 개념이 푸코 사유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입니다.(건화가 비교적 정리를 잘 했군요.) 이 개념의 맥락 및 문제들과 관련해서 미처 못한 얘기들은 담주에 풀어보겠습니다!

  • 2017-03-25 22:08
    어떤 것도 자명한 진리가 아니고, 그것을 시대에서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을 통해 역추적하는 계보학을 키워드로 계속 안고 가야겠네요. 들뢰즈의 책 제목인 차이와 반복도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과 어떤 점에서 통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