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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 미셸 푸코의 철학 <6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4-13 20:25
조회
266
1. 비판과 실존의 미학

푸코는 니체를 가장 능동적으로 자기화한 철학자라고 합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실존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만 정당화 된다’고 말했는데요, 니체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풍자적 명제’입니다. 사실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삶(실존)은 어떤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은 삶을 결여나 궁핍으로 여기고 삶 바깥에 어떤 변하지 않는 기준을 세우는 일에 몰두해왔습니다. 어떤 참된 것, 불변하는 것, 생성을 겪지 않는 것을 삶에 외삽해서, 이것을 통해 삶을 평가하는 일. 그 참된 것, 불변하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건, 그렇지 않다고 말하건 그러한 철학은 니체의 구도에서는 삶을 궁핍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푸코의 ‘실존의 미학’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어떤 외부적 척도도 거부했던 니체에게 윤리는 곧 미학의 문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푸코에게도 윤리의 문제는 그러한 외재적 척도를 거부하는 일이었습니다. 푸코는 실존을 어떤 변하지 않는 기준에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푸코에게 실존의 미학은 삶을 동질화시키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나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힘과의 관계를 문제 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을 거부할까’가 푸코의 질문이었다고 하죠. 푸코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를 동질적으로 만드는 것을 너무나 잘 참고 있습니다.

푸코가 실존의 동질화를 거부하기 위한 기술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은 ‘비판’입니다. 푸코의 알듯 말듯 한 정의에 따르면 비판은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푸코가 말하는 비판은 단순히 무언가에 반(反)하는 반동적인 힘이 아니라, 어떤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미래 혹은 질실’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죠. 푸코는 ‘덕(삶의 기예)으로 기능하는 비판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푸코는 이것을 15-16세기에 제기된 근본적 질문으로부터 발견하는데, 그 질문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지배와 복종의 관계는 역사상 계속 있어왔을 텐데도 푸코가 특별히 이 시기에 제기된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질문에는 ‘어떻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이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A와 B의 관계에는 A가 맺고 있는 다른 무수한 관계와 B가 맺고 있는 다른 무수한 관계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A와 B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통치자와 피통치자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이러한 조건 속에서 권력은 일방적으로 내리누르는 것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통치에는 통치 당하는 자의 자발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죠. 실제로 스스로 자신의 상품성을 키워 능동적으로 노동 시장에 판매하는 신자유주의의 ‘노동자-1인 기업가’만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또한 항상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어떻게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푸코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비판적인 태도’입니다. “통치 기예에 맞서는 반대자로서 혹은 상대방이자 동시에 적대자로서, 통치기예를 불신하고, 거부하고, 제한하며, 그것의 정당한 한도를 모색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며,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 하는 방식, 통치기예와 동일한 발전선 상에서 조용하게 그 당시 유럽에서 탄생했던 일종의 문화적인 형식,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태도, 사고방식과 같은 그 무엇”을 푸코는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예라고 이름붙입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하나의 권력과 그 권력에 반하는 힘의 변증법적 관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통치의 기예와 ‘이런 식으로, 이를 대가로 해서는 통치 당하지 않으려 하는 기예’의 동시적 탄생과 발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권력 대 저항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저항 자체의 능동성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비판은 “주체가 진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유발하는 권력 효과를, 권력에 대해서는 그것이 생산하는 진실 담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동향”입니다. 채운샘은 이것을 동일한 힘관계 안에서의 투쟁이 아니라, 힘관계 자체에 차이를 도입하는 일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비판이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발성을 갖기 위해서는 기존의 진실담론을 무너뜨리고 기존의 힘관계를 바꾸어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라는 푸코의 비판에 대한 정의가 이제 조금은 이해 될듯 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비판은 기존의 것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대한 안티테제와도 다릅니다.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예인 비판은 곧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고, 그렇다면 이는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자신을 창조하는 일은 아닐까요? 채운샘은 푸코의 철학은 질문을 탈주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상화나 도덕적 가치평가가 아닌 비판적 문제제기는 항상 자기변형을 동반한다고도 말씀하셨죠.

2. 푸코의 역사, 문서를 기념비화 하기

푸코는 역사를 총체화하는 보편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는 한편,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구조주의역시 거부합니다. ‘하나의 역사’를 거부한 푸코는 다양하고 복수적인 힘들 속에서 역사를 봅니다. 그러기 위한 푸코의 방법론은 문서를 기념비화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역사학은 어떤 자료에 의미가 내재해있다는 전제 하에 그러한 의미를 해독하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이는 우리의 에피스테메를 가지고 그 안에 있다고 가정되는 참된 의미를 확정해서 추출하는 일에 지나지 않겠죠. 이것은 ‘하나의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이에 비해 푸코는 어떤 사료를 기념비로 다룹니다. 푸코에게 문서는 폐허 속에서 발견된 돌 조각과 같습니다. ‘사료의 언어를 파편으로 이해하기’. 그리고 그것을 현재적 문제와 더불어 계열화하기. 이것이 푸코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과거가 어딘가에 온전히 남아 있어서, 우리는 그 의미를 파해쳐나가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푸코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의미조차 확정할 수 없으며, 얼마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더 먼 과거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의미는 어디에도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그것은 계열화입니다.

푸코는 들뢰즈로부터 ‘사건’ 개념을 포착했는데요,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이란 의미 이전에 있는 어떤 생성입니다. 의미는 사건이후에 발생하게 되는데, 의미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건을 하나의 사건의 주변에 위치시켜야 합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좌우에 어떤 사건이 위치되느냐에 의존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죠. 채운샘이 채플린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신 것처럼, 채플린이 깃발을 드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를 갖고있지 않지만, 그 전후의 상황 때문에 깃발을 드는 행위에는 의미가 깃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총체적 역사란 하나의 계열을 절대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의 2권에서 말한 것처럼 문제는 역사에 대해서 조형력을 갖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는 총체화하려는 계열을 파괴하고, 보편성과 자명성을 자임하는 계열을 폭파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계열화를 벗어나 다른 의미들을 발생시킬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역사가의 임무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계열화하느냐는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을 반영하고, 또 결정합니다. 새로운 계열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적 문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현재적 문제가 아니라면 고문서들 속에서 사건들을 다르게 계열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성되었나?’라는 물음은 ‘어떻게 이렇게 구성되기를 거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는 셈입니다.
전체 2

  • 2017-04-17 10:17
    푸코가 느무느무 좋다는 건화와 달리, 어렵고 수업따라가기가 벅찬 1인, 그나마 니체를 조금이라도 배운 맥락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래서 더욱 꼼꼼한 후기가 고맙다는.. (압박아님, 격려임)

  • 2017-04-17 11:00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계열화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알아가야 하는 걸까요....? 말은 쉽지만 항상 익숙한 방식으로만 사건을 보는 시선을 깨는 게 쉽지 않네요. 푸코를 통해서 왜 역사를 봐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도 조금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