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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 미셸 푸코의 철학 <5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4-06 18:32
조회
239
1. 에피스테메, 바닥 혹은 바닥-아래

이번 주에는 『말과 사물』에 관한 강의를 마저 들었습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르네상스시대와 고전주의 시대, 그리고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생소한 단어를 통해 푸코는 모든 경험이나 생각은 특정한 조건 위에서 성립하며, 특정한 조건 속에서 주체와 대상이 동시에 출현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상이 있어서 주체인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하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주체와 무관한 대상, 대상과 무관한 주체를 미리 상정하는 일이겠죠. 이때 우리는 ‘광기’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시대별로 상이하게 인식되어 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 하에서 우리는 ‘광기’라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이해가 점점 발달해 왔다거나, 인도주의적으로 변해왔다는 식의 연속적인 역사를 상상하게 되죠.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창조할 때 푸코는 이러한 인식을 거부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고정된 주체와 대상을 상정하는 ‘역사적’ 고찰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의 관점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는 사유가 시작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말과 사물』의 서론에서 푸코는 보르헤스의 텍스트가 야기한 웃음으로부터 이 책의 발상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의 발상은 보르헤스에 나오는 한 텍스트로부터, 그 텍스트를 읽었을 때 지금까지 간직해온 나의 사고의 전지평을 산산이 부숴 버린 웃음으로부터 연유한다.”

푸코와 들뢰즈는 철학이 ‘애지愛知’가 아닌 ‘혐지嫌知’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조건, 혹은 지반 속에서 사유합니다. 이 지반은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죠. 그러나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반을 결여한 보르헤스의 동물 분류표를 마주할 때 터져 나오는 웃음 속에서 우리는 ‘사고의 전지평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일격을 맞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하던 전제들을 의문시하게 될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는,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혼란에 빠질 때에야 우리는 사유를 시작하고 윤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니체와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은 ‘그러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분을 모두 방기하는 것’입니다. 푸코가 에피스테메를 분석하는 것은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공동의 지반을 가시화하고, 그것을 낯설게 보게 만들기 위함이겠지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푸코는 구조주의와 차이를 두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이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분명 탈주체적인 철학입니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국가’나 ‘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시스템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흔히 이것을 차이의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빈 칸’이라고 설명한다고 합니다. 한 칸이 비어있어서, 그 빈칸을 통해서 상이한 조합이 가능해지는 퍼즐을 떠올려보면 될 것 같습니다. 구조주의는 이러한 빈 칸에 의한 차이의 체계를 사유함으로써 고정된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주체와 대상은 모두 끊임없는 차이의 장 속에서 규정됩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이러한 차이의 장을 만들어 놓고서 차이들 자체가 아니라,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수에 관심을 둡니다. 라깡의 팔루스 같은 개념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식민지 국가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서 동일하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해내는 프로이트주의자들처럼 차이 속에서 변치 않는 상수를 이끌어냄으로써 모든 것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이야기한 에피스테메는 일종의 구조로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특정 시대 속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를 발견해내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의 연구는 ‘바닥’ 또는 ‘바닥-아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푸코의 이 새로운 계획을 사유가 발생하는 곳, 사유가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잠기게 되는 곳인 그런 ‘바닥’ 또는 ‘바닥-아래’에 대한 연구로 이해해야 한다. 푸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이 바닥 속에는 매우 다양한 지층이 있으며, 더 나아가 변이, 지형학적인 전복, 새로운 공간의 조직이 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사유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가능케 한 변이, 또는 고전 시대에 사유의 근대적인 이미지를 준비한 변이가 그러한 것들이다. (…) 우리는 이런저런 시대 속에서 그 시대의 지식의 공간을 결정하는 순수 사유의 사건, 근원적인 사건 또는 선험적인 사건을 인지해내야만 한다.”(질 들뢰즈, <인간, 그 모호한 존재>)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가 에피스테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변하지 않는 상수와 같은 인식의 조건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의 인식이 다양한 지층들, 변이들, 지형학적인 전복들을 내포하고 있는 꿈틀거리는 역동적 장입니다.

2.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채운샘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그리고 근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다뤄졌었지만,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인식의 핵심은 닮음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때 말과 사물은 유사성으로 매개되어 있습니다. 가령 ‘독수리’라는 말은 독수리 자체가 갖는 위엄을 동등하게 갖습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에세 인간과 세계는 대우주-소우주의 관계를 갖게 되고, 세계와 언어는 서로 닮은꼴입니다. 그렇기에 점성술은 지금과는 다른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겠죠.

돈키호테는 이러한 르네상스적 에피스테메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의 경계에 놓인 자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책과 세계는 더 이상 유사성의 관계 속에 매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돈키호테가 미친 것은 책을 믿었기 때문이죠. 그는 책과 세계를 명확히 구분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돈키호테라는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인물, 두 세계의 불일치 속에서 광인으로 출현한 자야말로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공통된 지반의 단절과 변이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요?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유사성으로 정의되었다면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수학적 체계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 안에서 인식의 핵심은 유사성을 해석해내는 데에 있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인식이란 어떤 앎의 도표에 세계를 기입하는 일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우에는 사물들 간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질서가 중심이 되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이제 차이를 파악하는 일이 문제가 됩니다. 사물들을 차이와 동일성에 의해 분류하고 배치하고 기입하는 것. 유사성이 아니라 비교가 중요해지는 것이죠. 17세기 회화론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호흐스트라텐이라는 화가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쌍둥이나 진짜 왕과 왕을 분장한 가짜 왕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개별자의 동일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가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표상과 세계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생각입니다. 회화의 경우 벨라스케스는 작품 안에서 요소들을 벽하게 질서화하는 과정을 통해 ‘회화’가 아니라 세계가 보이게끔 했죠.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은 지도 만들기와 비슷합니다. ‘지도’라는 이미지는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사물과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상으로서 스스로가 재현하고 있는 대상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지도라는 표상은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 외에, ‘표상된 것’으로서의 존재감은 갖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경우 ‘표상하는 행위’나 ‘표상하는 자’는 인식의 질서, 도표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와 근대의 에피스테메 사이의 가장 큰 단절은 여기에 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학문이 부의 분석, 언어, 자연사, 즉 인간이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들이었다면, 근대에는 (정치)경제학, 생물학 등 인식하는 자인 인간이 인식 대상으로 출현합니다. 그리고 투명한 체계였던, 그래서 문법적인 접근만이 문제가 되었던 언어가 연구의 대상으로 출현함으로써 ‘인식하는 행위’ 조차 인식에 미끄러져 들어옵니다.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핵심적 키워드는 바로 ‘인간’ 입니다. 인식 대상으로서 인간이 출현함으로써 인식하는 자로서의 인간 역시 출현하게 되는 것이죠. ‘휴머니즘’, ‘인권’, ‘평등’ 등의 관념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겠죠. 푸코가 르네상스-고전주의-근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것은 인간이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출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젠간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푸코는 인간이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확고한 가치 혹은 지반의 출현을 밝힘으로서 인간적인 사유를 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인간적 관점을 넘어서 어디에 이르고자 한 것일까요? 어쩌면 푸코는 어디에도 이르지 않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의 꿈은 비루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한동안 자신의 유명세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고 하죠.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 것. 이것이 그의 난해한 연구의 목표가 아니었을까요? “잠잠하고 겉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듯한 우리의 밑바탕에 단절, 불안정성, 균열을” 되돌려 주는 것. 물론 이는 어떤 구체적 얼굴로부터도 떠난 자리에 이르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의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느낌 뿐이네요^^ 다음 주에는 또 어떤 얼굴을 한 푸코와 만나볼 수 있을지 기대 됩니다.

다음 주 간식은 전연미선생님과  쿤우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562"]58e60bfc7cb248540560.jpg 푸코투척[/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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