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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1-01 19:02
조회
402
161105 동사서독 공지
이번 시간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람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자 역시 지(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보통 밝을 명(明)을 사용합니다. 상(常)을 아는 것이 명(明)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유한다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지만, 생각과 관계를 소유하는 것도 소유입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더 끊어내기 어렵고 미련이 남는 것이 생각과 관계에 대한 소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장이나 불교는 무엇보다 ‘나’라는 자기 유지 경향성에 주목합니다. 관계에 대한 소유, 감정과 생각에 대한 소유는 상실을 견디기 어렵게 하고, 또 생각을 부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면서 그것들로 ‘나’를 감싸면서 캄캄하게 만듭니다. 그 캄캄함. 소유로 덕지덕지 나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이 무지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나’라는 한 꺼풀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은 어둡고, 또 캄캄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것.
불교에서는 각(覺)이라는 글자를 말합니다. 이 역시 ‘나’라는 실체는 없는데 ‘나’라는 의식은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노자는 채움과 비움에 대해서 말하고요. 채우는 것은 소유이고 비우는 것은 이 채운 것을 비우는 것, 나를 채우면서 변이하는 세상을 알지 못하고 자기로 가득 찬 어리석음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넘어지지 인연조건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채우는 것은 배움으로도 가능합니다. 배움으로 나를 감싸면서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행하는 것 말입니다. 모르겠고 헤매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배움에서 또 다른 배움으로, 그저 옮겨가기만 하면 그건 어리석음을 넘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감싸고 캄캄하게 만드는 공부입니다. 성인들은 고착이 없는 배움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노자는 명(明)을 위하지 않고 그저 지(知)를 위한 배움은 배움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노자가 말하는 지(知)와 무지(無知)는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캄캄하게 자기를 감싸는 공부가 아니라 한 치 앞을 아는 공부, 고집불통과 어리석음을 비우는 공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부는 대체 뭘까요? 채운쌤은 절학(絶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배움은 배우고 나면 끊어버려야 한다고요. 배운 곳에서 떠나서 자기의 배움으로 네트워킹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부처의 법이 좋아야지 부처가 좋으면 안 된다는 것. 공부를 하면서 계속 공부하는 자리를 바꿔야 한다고요. 그러면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정말 무념(無念)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 가지 생각만 공고하게 갖고 있는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한 가지 생각만 가지고 있어봐야 세상은 늘 변이합니다. 그 생각이 늘 가치 있지 않음을 봐야 우리는 나 자신을 감싸는 공부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능이 있으면 칭찬을 받고, 그러면서 그 재능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재능은 무상합니다. 19세기의 의술이나 예술적 재능은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재능이 영원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여겨지고, 모두가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캄캄함입니다. 무슨 재능을 가지고 살든 세상과 나에 대한 자기 철학이 없으면, 즉 떳떳함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시국과 맞물려^^ 노자의 치국(治國)에 대한 이야기가 뜨거웠죠. 각 시대마다 필요한 사상은 다릅니다. 유가 같은 경우는 자신의 존재를 다듬으면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문제의식이 있고, 제국이 잘 돌아갈 때는 역시 유가가 소환되어 활약하기에 좋은 시기 같습니다. 하지만 노자는 소국의 국가론입니다. 소국에 대한 치국론은 언제 필요가 있을까요? 소국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노자가 소환되는 시기는 위진시대, 즉 자기 존재의 존망이 위협받는 시기였습니다. 제국의 질서가 고장 나는 시기에 노자가 소환됩니다. 유가는 수신을 한 사람을 알아봄, 즉 지인(知人)을 통해 인재를 발탁하여 무위(無爲)에 다다르는 정치를 이상으로 여기지만, 그것마저 불가능한 시기, ‘그 훌륭한 사람’은 대체 무엇인지, ‘이상적인 인간’조차 사실은 억압이 아닌지 묻는 노자가 일어서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대국가는 전근대의 관료제 국가와는 또 다릅니다. 이전에는 전제군주와 관료가 백성들을 통치하는 국가였다면 지금은 촘촘한 제도가 국가를 돌리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모든 제도의 망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현대의 국가입니다. 국가는 신체를 촘촘하게 길들이고, 우리는 불편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거기에 따르며, 한편으로는 지난한 서류작업을 하면서라도 국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기를 씁니다. 신체가 관료화되고 무력화되는 시기, 이건 자기 존재를 위협받는 것이 아닐까요? 다만 위진시대는 기존의 질서가 고장 나면서 자신의 존망이 위협받았다면 지금은 질서가 너무 견고해서 무력해지는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 것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국가에 함부로 대해지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서류를 만들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서류를 만들지 않는 삶이라니, 카드를 한번 긁어도 영수증이 팔 길이만큼 나오는 시대에 사실 너무 어렵고 귀찮은 일입니다. 지금 사는 방식대로 살면 며칠도 못 견디고 다시 서류에 둘러싸여서 내가 귀찮기 않기 위해 귀찮게 서류를 만드는 삶을 반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서류를 만들지 않기 위한 새로운 네트워킹이 없으면 요원한 일입니다. 지금은 ‘국가를 위해’라든가 ‘우리를 억압하는 국가’처럼 의인화되는 국가를 살지 않습니다. 이미 제도에 길들여져 있고 그 시스템의 일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고장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다른 네트워킹 속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노자식의 공동체 리더십은 그런 네트워크 안에서 가능하고요.
채운쌤은 우리의 문제의식은 이미 국가가 아니며, 국가가 뭘 하든 국가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문제가 없는 시스템은 없고, 문제는 우리에게 자기 담론이 있느냐, 자기 스스로 세상과 나에 대한 철학을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자기의 로고스를 사용해 이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담론화가 필요하며, 그래야 세상이 뭘 하든 떳떳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 윤리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나’가 나 아닌 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나’를 감싸는 캄캄함 속에서 내 어리석음에 걸려 넘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이미 나 아닌 것에 의해 존재하므로, 나 아닌 것에 대한 경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본질이고, 규정성 안에는 이미 그 규정성 안에 머물지 않으려는 힘, 변이의 힘이 내포되어 있으니까요. 다만 나이고자 하는 경향성을 따르는 것은 내가 아닌 것에 대한 경향성을 따르는 것보다 쉽습니다. 왜냐하면 후자는 실험이 필요하니까요. 편안한 전제를 떠나서 새로운 관계를 실험해야 하니까요. 이 귀찮음과 나태함을 떨치지 못하면 나는 계속 나에게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건이 닥치지 않게 생겨먹었으니까요.

다음 시간은 21~28장 읽어옵니다

간식은 규창, 이응언니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6-11-02 01:43
    조별 토론에서, 樸(박)자가 15장에 이어서 19장에도 나오는데, 19장에는 素(소)가 같이 나오더군요. '박'에 대해서는 아직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도의 특성이지 않을까라는 얘기가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소'가 어떻게 다뤄졌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15장에서 '혼혜기약탁'이란 글자는 혼탁한 물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도 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맑은 물에 움직임이 일어나면 침전물 때문에 흙탕물이 되고, 그 움직임이 끝나면 또 다시 맑아지는 과정이 그야말로 40장에 나오는 '반자도지동'을 떠올리게끔 했습니다. 항상 흙탕물이지도 않고, 항상 맑은 물이지도 않은 그 사이의 상태가 어떤 것일지 계속 생각하게 만드네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