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수정) 노자 11. 5 후기 +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6-11-07 21:24
조회
378
이번 시간에는 도덕경 21장에서 28장까지 읽었습니다. 도덕경의 내용은 대체로 도가 이렇고 덕이 저렇고~ 하는 추상적인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자칫 엉성하게 읽어버리면 그렇구나~ 하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1장에 나오는 ‘황홀(恍惚)’이라는 글자는 ‘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노자의 철학을 이해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도 알려줍니다.

이 글자는 14장에도 나오는데, 진고응본 해설을 보면 “있는 듯하면서 없는 듯하고, 찬란하여 일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최진석 선생님의 해설에서는, ‘황’은 너무 밝아서 흐릿한 것이고, ‘홀’은 너무 어두워서 흐릿한 것이라고 합니다. 노자가 ‘도’를 ‘황홀’하다고 한 것은 그만큼 ‘도’가 의식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를 생각하면 1장의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도’는 이미 우리의 의식, 사물을 정의하고 분별하려는 인식 그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가 ‘도’를 분별하려는 순간 그것은 ‘도’에서 멀어집니다. 지지난 시간 채운쌤이 말씀하신 것 중에 아(我)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 얘기하신 게 생각납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판단이나 사고, 관계 같은 일상의 모든 것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들 덕분에 우리는 자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시야가 ‘아’에 의해 가려집니다. 여기서 노자의 철학은 바로 이런 ‘아’를 깨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한낱 무지렁이인 까닭에 아직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텍스트에서 나온 상(象), 물(物), 정(精)과 같은 글자들에 대한 해석은 우리의 선배(?)들이 그런 인식을 깨면서 낸 것입니다. 물론 저렇게 사유하기란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하면 저런 해석이 나왔을까?’와 같이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삶과 부딪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21장은 처음으로 ‘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1장에서 ‘도’는 현(玄)하다고 했습니다. ‘덕’ 역시 ‘도’와 비슷하게 ‘홀황’ 혹은 ‘황홀’합니다. 다만 ‘도’와 ‘덕’을 다르게 부르는 것은 ‘도’의 작용이 현실세계로 드러난 것을 ‘덕’이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가 있음을 ‘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노자는 ‘도’와 ‘덕’을 표현할 때 ‘현’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요? ‘현’과 ‘홀’, ‘황’ 같이 언뜻 보기에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뉘어 쓴 것을 보면 아마 그 뜻이 조금은 다른 것이겠죠? 이러한 차이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2장은 2장과 3장의 내용과 통합니다. ‘굽으면 오히려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온전하기 위해서 굽는다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단순히 원인과 결과의 측면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노자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상호의존/대립 사이를 반복하는 운동성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어떤 것으로 파악하지만 사물에는 여전히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것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최진석 선생님은 자주 ‘도’를 새끼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새끼줄은 하나이지만 두 개의 줄이 꼬여서 이루어집니다. ‘도’ 역시 이 새끼줄처럼 하나이지만 우리가 파악하는 모습과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 2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곡즉전(曲則全)’이라는 구절을 이해할 때는 구부리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아니라 구부림 안에 온전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채운쌤은 ‘곡’이나 ‘직(直)’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구부리거나 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보는 것, 시(時)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시’라는 글자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 포함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분별적 인식 때문에 ‘시’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높은 자리라도 단지 머물다 지나갈 뿐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자리가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이 스스로 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위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아’이며, 이 ‘아’로 인해 ‘시’를 보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논어 ‘이인’ 14장을 보면 ‘지위에 오르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지 못함을 걱정하라. 남들이 자신을 알지를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남들이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기준을 자신에게서 찾지, 지위와 같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채운쌤이 노자의 철학과 공자의 철학이 극단에서 만나면 비슷할 것이라고 했는데, 왠지 비슷한 모습인 것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즉(則)’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최진석 선생님은 ‘도’의 대립/의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이(是以)’라는 글자는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지만, 노자의 글은 자연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그것을 사람에게로 끌어오는 형식을 많이 취합니다. ‘시이’라는 글자는 자연의 모습, ‘천도(天道)’를 ‘인도(人道)’로 가지고 오는 경계를 보여줍니다.

저의 이런 것 같다~의 느낌을 또 살려보면, 생물들의 삶을 보면 사람의 척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납니다. 사마귀의 짝짓기의 경우에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암컷에게는 수컷이라는 개념이 없고, 단지 자신보다 몸집이 작으면 그저 먹이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수컷은 보통 암컷보다 몸집이 작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수컷이 다음 세대를 위해 암컷에게 자발적으로 먹힘으로써 영양분을 제공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컷은 자신을 먹이로만 보는 암컷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다 암컷이 자신을 보면 멈추고, 다시 다가가는 것을 반복해서 짝짓기를 합니다. (마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이지요.) 이때 암컷이 눈치 채면 수컷은 잡아먹히는데 재밌는 것은 잡아먹히면서도 짝짓기를 계속 하고, 머리가 뜯기고 가슴까지 먹혀도 그 기세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더욱 강렬해진다고 합니다.) 물론 암컷에게 들키지 않은 수컷은 짝짓기가 끝나면 유유히 사라지겠죠.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의도를 알 수 있을까요? 수컷 사마귀가 죽음을 각오한다고 그것이 죽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짓기를 시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입니다. 인간의 분별로는 ‘자연’의 의도를 파악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자연’을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치척도의 체계를 멈출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인간의 본성 자체가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문제는 분별적 의식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노자 역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었겠죠? 다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오면 유지하려 하고, 싫어하는 것이 오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희망한다고 정말 그렇게 될까요? 언뜻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파악하지 못한 모습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노자의 철학을 하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분별적 인식을 깨는 방법이겠죠. 자연을 보면서 신기한 것은 자연에는 생존과 번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지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만 자연을 이해할 때 일관된 가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1장에 나온 ‘상(常)’이라는 글자를 얘기하셨습니다. 이 ‘상’이라는 글자는 일관됨을 얘기하는 것인데, 이때의 일관됨은 하나로 고정된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관된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수많은 움직임, 변수들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좋음, 나쁨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이 어떻게 좋음과 나쁨이 항상 고정될 수 있을까요?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는 이미 사회적 가치척도에 의해 판별된 이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관된 좋고 나쁨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좋음과 나쁨 역시 인간의 분별일 뿐입니다.

27장은 성인의 ‘무위지치’에 대해 얘기합니다.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실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의 원리, ‘도’로 만물을 볼 뿐입니다. 따라서 복잡하지도 없고, 그 원리만이 있을 뿐이니 주판과 같은 다른 도구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때문에 도를 지닌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이 그 재능을 충분히 잘 발휘하도록 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항상 모든 물건이 그 쓰임을 다하도록 잘 활용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이것을 밝음을 유지한다(습명襲明)고 한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노자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차원이지만 통치철학이기도 합니다. 해석본들마다 자신이 관심가지는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도’에 관한 견해, 그것으로부터 가져오는 통치에 관한 견해는 다르지 않습니다. 즉, 노자의 철학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채운쌤은 번뇌가 없는 게 아니라 번뇌를 보지 않으려고 것에 대해 콕 집어주셨습니다. ‘시’를 보지 않으려는 관성을 깨야만 ‘습명’, ‘상’을 아는 것입니다. ‘후....... 공부가 참 어렵습니다.’로 끝내려고 했지만 그냥 제가 공부를 편하게만 하려고 하는 것이었네요. ㅋㅋ;;

다음 시간에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썼던 공통과제에 대한 합평이 있습니다. 각자 여태 쓴 과제들, 도덕경 1장을 읽으면서 쓴 공통과제들을 잊지 말고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29장부터 37장까지 읽고 해석과 공통과제 써 오시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간식은 재원누나와 란다쌤!
전체 2

  • 2016-11-08 08:05
    사마귀 얘기의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거?ㅋㅋㅋ스트레스만 받고 번뇌하지 않는다는 쌤 말씀이... 강하게 남네요...

  • 2016-11-10 21:11
    사마귀가 어쨌다고요?? ㅋㅋㅋㅋ 아 웃겨요..
    그리고 "자연을 보면서 신기한 것은 자연에는 생존과 번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지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 읽고 빵터졌어요. 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