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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11. 12 후기 및 숙제공지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1-16 11:31
조회
401
후기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많았지만 제가 주의깊게 들은 것 몇 가지를 중심으로 얘기해 볼게요.

먼저, 채운샘은 주역과 노자를 비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주역도 음양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음양의 위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역은 양을 우선시합니다. 양을 군자로 비유하거나, 음을 소인으로 비유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양이 앞서가고 음이 따라간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요. 성실히 나아가는 힘이 양이라면, 음의 기운은 그에 비해 일관되지 않다든가, 양이 발산이라면 음은 응집하고 뭉치는 기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음의 기운들이 뭉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전체적으로 양의 기운에 무게를 더 두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노자는 이와 정반대로 음을 중시하는 분위기죠. 물이나 영아나 골짜기, 통나무 같은 것들은 다 음의 이미지입니다.

‘박(樸)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순수한 무언가’를 강조한다기보다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고, 존재가 규정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에요. 노자도 우리가 규정된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요(언어가 규정적으로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하죠). 제도와 시스템에 의존하는 세계는 극도로 규정된 세계이자 명(名)의 세계예요.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규정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돼요. 정당성, 인의, 시비 등등의 가치를 내세우고 좋고 나쁨의 가치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각자의 옳음을 서로에게 강요하면서 다양한 갈등이 발생하게 되고요. 이런 갈등은 보통 내 규정성으로 타인의 규정성을 재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요(내 것이 아닌 것을 배제하는 것과, 내 것으로 동화시키려는 것은 같은 원리라고 해요). 당시 철기시대엔 생산력이 급증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축적이 늘어나 계급의 불평등이 발생했어요. 물론 축적 이후의 다툼(전쟁)은 그 이전의 것과는 그 규모의 차원이 달랐죠.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노자는 ‘갓난아이’와 ‘통나무’로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어요. 갓난아이는 엄마나 아빠의 규정을 모르는 생명의 덩어리의 차원이에요. 통나무도 다듬어지기 이전의 자연 그대로의 상태, 그러니까 규정 이전의 상태이자 천지의 불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고요. 자연은 일정한 가치기준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불인하죠. 인간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 자신이 싫은 것을 악으로 규정하지만요. 예를 들면 해충은 인간에게만 악이지 자연 전체로 보면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런 해충을 인간이 박멸하려고 들면, 그 해충을 먹이로 하는 생물이나, 그와 연결된 생물들은 모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 있겠죠.

28장에 나오는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라는 말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통나무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지 못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 문물제도에 편입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어요. 자연의 리듬에 따르는 것을 본성이라고 볼 때, 기(器)로 대표되는 것은 제도와 문명으로, 기본적으로 본성에 대한 억압일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서 노자와 공자의 큰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단순하게 표현하면 공자는 기(器)를 쓰고 노자는 박(樸)을 쓰는 것이죠. 공자는 인간이 동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방식으로 ‘타고난 본성’을 문물제도와 전통에 맞게 닦아나가는 것에 중심을 둡니다(여기서 본성은 인의예지신이 돼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 각각의 역할과 본분을 나누어 아주 적극적으로 문물제도에 편입합니다. 이에 비해 노자는 인의예지신을 억압으로 봐요. 그에게 완벽한 정치는 나누지 않는 것이에요. 노자는 사회가 부여한 코드가 아니라 가장 최소한의 본성이자 생명의 기본적인 차원에서의 순박함을 어린아이와 통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앎(知)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요. 우리의 사회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부를 독점하기 위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는 수단이죠.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넣기 위해 그렇게들 애를 쓰는 건 계급적 앎이 특권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통 앎은 인간사회에서 탐심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제도가 널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했다는데, 우리는 오히려 탐욕을 채우는 방식으로 앎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죠. 제도가 없는 사회는 불가능하겠지만, 노자가 얘기한 것은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제도가 갖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식이에요. 사실 우리와 시대적으로 훨씬 가까운 일리치가 한 말도 같은 맥락인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지금 노자를 공부하는 것, 그러니까 오히려 사욕을 떨쳐내고 제도의 영향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앎(知)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여기서 제가 이사할 집을 알 보기 위해 부동산 어플을 자꾸 보게 된다고 털어놓은 토론내용을 훔쳐들으신(?!) 채운샘이 이것을 예로 드셨는데요(ㅠㅠ). 내 손안에 언제든 볼 수 있는 핸드폰 속의 다양한 어플들, 직접 가지 않고도 지금 여기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편리함으로 우릴 유혹하는 그런 어플들이 사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얘기였어요. 집을 구하는 것을 예로 들면, 일주일에 하루든 이틀이든 보러가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 때만 찾아보게 되면, 집을 돌아보는 그 날에만 집 생각을 하고 다른 날들에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죠.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그 어플 때문에, 집을 보러가지 않는 날에도,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그 어플과 집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편해진 게 아니라 부동산 어플에 종속되는 것이고요(여기서 제가 규창이에게 ‘규문 싸이트가 우릴 구속해’라고 장난을 쳤던 기억이 나네요. 흐흐). 어떤 것이 있으니 이제 신경을 쓰게 되잖아요. 필요해서 제도를 활용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제도에 포섭되고 말죠. 그래서 제도를 가진다는 건 의식적이고 부단한 노력을 따로 하지 않는 한 그 제도가 날 함부로 하게 허락하는 것과 자꾸 연결이 돼요. 그래서 우리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제도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가 되는 거예요. 여기가 바로 ‘노자적인 삶이 무엇인가’의 고민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노자가 말한 소박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제도와의 관계를 줄이는 것이 돼요.

마지막으로 ‘무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요. 저희 조에서 전쟁에 대한 노자의 이야기를 읽고 토론을 할 때, 핵을 가진 상대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힘을 가지는 것, 그러니까 우리도 핵을 가지고 서로의 힘에 균형을 맞추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상대를 어떻게 믿고 무장해제를 하냐는 거죠. 특히나 자국의 이익만을 대놓고 추구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요. 채운샘은 불가능해 보여도 누군가는 그것을 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얘길 하셨어요.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을 생각해 보면, 내가 내 무기들을 내려놓을 때 상대의 총칼이 부끄러워지는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한마디 해주려고, 상대에게 쏟아부을 말들을 막 준비해서 갔는데, 상대가 진심으로 먼저 사과를 하면서 내게 숙이고 들어오는 순간, 씩씩대며 준비한 상대를 모욕하는 말들이 부끄러워진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해보지 않고서 불가능하다는 벽을 먼저 세우는 경우가 많아요. 공부로 예를 들면 바로 부끄러워지지만, 우린 공부를 할 때 어려운 것은 할 수 없고 불가능하다고 미리 벽을 높고 두껍게 세우잖아요. 여기서 채운샘은 자신이 만든 임의적 시간의 방향 속에 기대를 투사하지 않고,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무위라고 말씀하셨어요. 나중에 뭘 해야지, 하고 계획을 세우고 꿈만 크게 갖는 것이 아니라, 또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숙제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을 읽는 순간, 설거지하는 순간, 그때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듯이 사는 것, 내가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무위일 수 있다고요. 여기서 전 속으로 ‘와아’ 했어요. 저는 항상 미래를 설정해서 계획만 세우고, 그러고도 실천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또 미워하며 자책하고, 또 다시 계획을 세우고 이런 걸 반복하며 살거든요. 게다가 산만해서 뭘 하든 다른 것에 대한 걱정이나 생각들을 같이 갖고 있어요. 멀티태스킹은 무슨! 같이 하는 모든 일의 강도가 다 약해지죠. 하나를 제대로 한다기보다 허접하게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해야 할까요. 노자가 하는 말들이 그 옛날 멀리서 하는 훌륭한 말들로만 여겨졌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다니 새로운 감동이 있었어요. 앞으로 우리의 노자읽기는 이렇게 노자의 말과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만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것이어야 하겠어요. 매번 채운샘께서 하셨던 말씀인데도 아, 이거구나 느끼는 건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학기의 반이 넘어가는데!).

돌아오는 동사서독 시간의 과제는, 지금까지의 1~37장의 내용 중에서 하나의 주제를 각자 정해서 글을 쓰는 건데요. 그 주제로 연결되는 장들을 몇 개씩 추려 와야 해요. 노자의 실제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예를 들어 보자면, 4, 10, 12장이 ‘도의 작용’이라는 주제로 연결이 된다 싶으면, 4, 10, 12장의 본문을 묶고 공통과제를 쓰는 것이죠. 저는 일단 이렇게 이해했는데, 혹시 고칠 점이 있으면 아래 댓글로 좀 달아주세요! 간식도요!

암튼 노자는 깊이 생각하고 읽는 시간이 없으면 정말 맹숭맹숭 그 말이 그 말인 것처럼 붕붕 떠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고민하는 만큼 깨달음을 돌려주는 노자입니다. 정성들여 숙제합시다. 모두 토요일에 만나요.
전체 3

  • 2016-11-16 13:02
    몽~~ 감동적인 후기이네요..고마와요~!!

  • 2016-11-16 14:04
    공통과제는 재원누나가 위에 적으신 것처럼 쓰시고, 38~45장 읽고 평소 하던대로 해석 숙제도 해오셔야 합니다~

  • 2016-11-16 23:14
    핸드폰 하나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저는 할 수 있는게 많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핸드폰에 묶여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택의 여지가 많아진 시대(혹은 선택하도록 구축된 사회?)에서 노자의 무위는 새롭네요. 너무나도 새로워서 잘 안 받아들여지는 걸까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