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8/3 후기

작성자
답답이
작성일
2016-08-09 18:23
조회
673
자본주의 두 번째 시간 이었습니다. 논리는 간단했는데 왜 이리 추려내기가 어렵던지요ㅜ

들뢰즈는 왜 정신분석을 비판할까요? 그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이지요. 정신분석이 자본주의에 논리적 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샘은 이 근거를 자본주의 안에서 가족이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제 군주 시대에는 애 어른 할 거 없이 가족구성원이 모두 자기 몫의 노동을 담당하는 생산의 단위였죠. 자본주의는 그 본능인 탈코드화를 통해 가족 공동체를 재구성합니다. 신화적재현도 해체하고 시간도 해체해 가족이라는 틀로 가져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인 모든 것을 uni하게 만들기 위해서이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권도 그저 동일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그들에겐 자유가 주어져 있고 자유롭게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죠. uni해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가족을 위해 봉사하게 합니다. 자본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한 인간입니다.

푸코는 규율권력이라는 말로 이것을 비판합니다. 규율권력은 개체를 규격화하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관리 하여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인구의 유입, 흐름을 관리하기 위해 생명을 관리합니다. 자본주의 또 하나의 특징인 ‘흐름’만이 기입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리가 용이하려면 개체가 ‘하나’로 매끈해져야 하는 거죠. 그래야 관리하기 쉬우니까요.

이런 자본주의의 특성 위에 이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정치경제학과 조우합니다. 그의 목표는 어떻게 인간의 심리를 양화(quantity)할까? 였다고 해요. 프로이트는 그 열쇠를 리카아도 정치경제학의 개념에서 찾습니다. 리카아도의 역할은 고전시대의 부의 개념을 정치경제학으로 전환시킨 것이라고 하네요. 정치경제학은 경제 내에 투여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산출해 내는 것인데요, 기존엔 부의가치가 토지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필요를 충분히 충족시켜준다고 보았지요. 그러나 리키아도는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없다는 희소성을 전제합니다. 그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노동을 한다는 거죠. 즉 인간의 노동원리를 ‘결여’에서 찾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투여되는 노동량을 시간으로 환산해 가치를 결정하는 것으로, 가치생산 기준을 ‘양화’시킨 것이죠. 노동으로 환원된 가치가 다시 시간으로 양화되는 거죠.

프로이트가 이러한 리카아도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 정신분석에 응용한 것이 ‘리비도 경제학’ 입니다. 뉴런으로 몰리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할 수 있고 욕망의 생산, 소비, 분배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거랍니다. 경제학에 결여된 재원이 있듯, 프로이트 역시 욕망이 어머니를 얻지 못하는 좌절에서 온다고 보았고, 그 좌절과 결여로부터 무의식을 조직합니다. 이 결여를 내면화 하는 게 오디푸스화 하는 것이지요.

욕망의 생산성, 능동성이 결여로 바뀌는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이 부르조아의 가족주의에 복무하며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갖추게 됩니다. 가족장 안에서도 결여되어 있고 사회장에서도 결여되어 있는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노동자의 전제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위에서도 밝혔듯 가족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샘은 여기서 ‘가족의 사유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 하셨죠. 사회장에 개별 인간으로 투자되던 노동이 사회적 장에서 철회되어 하나의 노동자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거죠. 가족은 더 이상 사회 안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노동의 댓가를 소비하고 안식하는 단위로 전락합니다. 가족은 그렇게 ‘사적’ 영역이 되었고 가족내의 정서적 연대가 형성됩니다. 가장의 부양의무와 엄마의 희생과 아이의 기쁨조 역할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가족 공동체는 붕괴되는 탈코드화의 흐름에 따라 ‘사유화된 가족’으로 전환됩니다. 결국 가족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조작된 것이지요. 이렇게 자본주의에서 오디푸스가 탄생합니다.

 

이제 ‘도처’에서 사적 영역의 오디푸스가 발견됩니다. 사장님도 대통령도, 사제도, 모두 가족삼각형의 이미지로 소급됩니다. 자본주의는 형태만 다를 뿐 가족이라는 견고한 틀이 어디에도 투여되어집니다. 가족주의는 자본주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해서 ‘혁명’은 자본주의만도 가족주의만도 아닌 ‘동시’에 문제제기를 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오디푸스라는 가족 안에 갇힌 성에 대해 들뢰즈 가타리는 말합니다. 이들은 사랑이란 남여 만이 아니라 ‘수천수만이 하는것’ 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여자 안에 남자만큼의 성이 남자에게도 여자만큼의 성’ 이 있다고 말입니다. 고로 <n개의 성>이 있다고 합니다. 분열-분석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합니다.(요건 마지막 강의에) 가족주의 안에 사회적 욕망이 어떻게 투사되고 있는가를 보려는 것이지요.

이들은, 필요나 결여에 따라 욕망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욕망이 선차적이고, 또 욕망은 사회적 투자임을, 욕망에 따라 필요가 달라짐을 강조합니다. 프로이트의 욕망이 개체군에 집단적으로 투자된다고 보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 욕망은 끊임없이 신체를 흘러 다니면서 접속하고 결합합니다. 이런 욕망 전체를 <기관없는 신체>라고 합니다. 이 신체는 언제나 편집증적인 투자와 분열증적인 투자의 두 측면이 함께 분기합니다. 양자가 선택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편집증으로 갈수도, 분열증으로 갈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윤리적 측면에서 굉장히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문제제기이자, 자기 문제로 와서는 더 다양하고 획기적인 시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다시 제자리로 와 자신과 대면해야만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지점에 오면 아- 좀 답답해지는데요. 책 한권이 끝나가는데 저의 미진함은 끝이 없네요. 죄송합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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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09 18:59
    어째서 죄송하다 하시나요. 혹시 너무 늦게 올리신 것 땜에?ㅋㅋㅋ 어떤 지점에서 답답함을 느끼시는지, 내일 좀 더 듣고 싶네요.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