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9.2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9-08 19:01
조회
590
절탁 4학기 <천의 고원>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채운 쌤 말씀대로 들뢰즈가 아직 안 죽은 모양입니다. 지난 학기보다 약간 인원이 늘어, 또 한 번 책상을 새로 장만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네요^^
모두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함께 즐겁게 공부해보아요.

첫 시간에는 <서문: 리좀>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처음이신 분들은 정말 어안이 벙벙하셨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매혹과 짜릿함을 맛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도 어쩐지 멋있고 아주 중요한 말 같은, 뭐 그런 기분을, 앞으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끼게 될 것 같지요^^;

지난 학기에 읽은 <앙띠>에서 핵심 개념어는 욕망 / 기계 / 생산이었죠.
욕망의 본질은 재현이 아니라 생산에 있다는 것, 욕망은 기계 작동한다는 것,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이항 기계와 연결접속함으로써 특정한 것을 생산한다는 것이 <앙띠>의 골자였습니다.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고원>에서는 욕망이라는 단어가 모습을 감추는 대신 높은 출연 빈도를 자랑하는 새로운 단어를 만나볼 수 있다는데요. ‘배치’가 그것이랍니다.
<앙띠> 수업 중에도 종종 배치라는 단어를 듣곤 했는데, <고원> 1장을 펴자마자 떡하니 그 말이 나오네요. 저자들에 의하면 책은 하나의 배치물이랍니다.

사실 배치 개념은 <앙띠>를 공부한 이들에게는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제 수업에서도 채운 쌤께서 재차 말씀하셨습니다만, 저자들이 정신분석을 문제 삼으면서 내놓은 새로운 욕망론의 요체는, 욕망이 결코 가족적이거나 사적이지 않다는 것, 욕망은 역사․사회적으로 특정하게 형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원>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특정한 배치 안에서 특정한 배치물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대중 사이를 흐르는 어떤 특정한 욕망들, 하나의 책이 집필되고 발표되고 읽히는 방식, 개인이 국가나 가족이나 회사에 대해 만드는 상, 이 모든 것이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배치에 기인한다는 거죠.

하지만 좀 더 나아가, 힘의 작용이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보다 중요한 듯합니다.
수업 중에 나온 예 중 하나인 ‘패치워크’를 떠올려보면 좋겠네요.
선험적인 구조가 있어서 그것이 욕망과 책과 기타 등등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생산물이 새로 출현함과 더불어 생산물이 놓인 장 전체가 매번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패치워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잘 보여주지요.
파란 털실 한 올, 노란 천 한 조각을 새로 이어붙이고 꿰맬 때마다 접합 부위(?)만이 아니라 수예품 전체의 톤이 새롭게 생산되잖아요.
말하자면 강력한 구조가 생산라인처럼 존재해 공산품을 찍어내듯 배치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배치물이 생산됨과 더불어 배치물이 존재하는 배치 전체가 역동적으로 생산된다는 것, 그게 일단 들뢰즈+가타리가 배치 개념을 중시하는 이유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중간밖에 없다”는 채운 쌤의 설명을 이와 결부지어 이해합시다.
배치물은 단지 배치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배치의 구성에 매번 참여하는 조건들에 다름 아닌데, 그것은 배치물들이 고정된/자기동일성을 가진/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늘 이행하고 변형하면서 오직 강도로서 존재하는 ‘중간’이기 때문입니다.
<앙띠>에서 말한 부분대상으로서의 기계를 떠올려도 좋을 듯해요. 매번 이질적인 것과 접속함으로써 새로이 ‘생산되고’ 동시에 ‘생산하는’ 기계.
들뢰즈+가타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간주했었지요. 여기 <고원>에서 그것은 이제 다양체라 불리는 듯합니다.
모든 다양체는 이질적인 다양체와 만나 리좀을 구성하면서 일시적으로 체계를 구성하고 다시 그 체계를 부순다지요.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은, 일단 만들어진 뒤 지층에 갇힌 화석이 되는 게 아니라 세계 안에서 다른 다양체를 만나 리좀을 구성하면서 세계 안에서 매번 새로운 배치들을 발견, 생산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훌륭한 책은 아마 신앙처럼 가슴에 새겨둘 좋은 말이 많이 담긴 책이 아니라, 접속면이 많은 책, 변신의 잠재성이 높은 책(이걸 ‘횡단계수’라 부르는 것 같기도…)일 듯하군요.

자, 이제 <고원>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CsO니, n-1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아주 이상한 책이지요.
어제 함께 읽은 대담을 보니 우리 같은 초짜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것 같지요? “멋있어 보이려고” 그런 까다로운 말을 하는 것 아니냐고ㅋㅋㅋ
그에 대해 들뢰즈는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거나 발견하거나, 혹은 기존에 사로잡혀 있던 의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곧 ‘철학’이라 답했는데, 그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 책에서 발견되는 숱한 낯선 단어들은 일종의 낯선 힘들 같기도 합니다.
그것에 충격 받고 머리가 띵해지고 박수를 치게 되는 경험 속에서 독자는 비로소 사유를, 그러니까 기존의 습관적 판단을 저지당하고 그것이 교란되는 일을 겪을 수 있겠지요.
마땅히 그걸 겪기 위해서가 아니면 미쳤다고 소중한 오후의 세 시간을 이 좁은 방에 우리가 모여 앉아 있겠습니까^^
(<고원> 속표지의 흑백사진을 보니 들뢰즈를 빽빽이 에워싼 학생들이 뿜는 열기가 대단하던데, 저는 1장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사진에 새삼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습니다.)

모쪼록 이 책의 낯선 문장들을 도그마화함으로써 지층에 갇힐 것이 아니라, 이 책 안에 펼쳐진 고원들 사이를 즐겁게 뛰어다니며 사유의 새로운 선을 그릴 수 있는 한 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철학책은 하나의 공구함, 공구에서 이것저것 빼내 이것저것을 조립하고 해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번 학기 우리가 가장 열심히 해야 할 일 같습니다.

자, 이 기분으로 쭉 가봅시다! 다음 시간에는 2장+6장 읽어 오심 됩니다.
후기는 락쿤쌤, 간식은 혜원+권경덕 님.
추석 잘 보내시고, 연휴 중에도 <고원> 꺼내 보시고, 9월 21일에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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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8 21:49
    수경샘의 보살심이 유난히도 후끈, 다가오는 공지글 잘 읽었슴다.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