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천개의 고원 , 서론 후기

작성자
락쿤
작성일
2016-09-13 13:56
조회
975
너무나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천개의 고원>에서는 몇 개의 개념이 계속 반복되어 나온다고 하죠. 어느 쳅터를 먼저 읽어도 무관하고,  또 한 쳅터에 나오는 개념들을 열심히 파더라도 다른 쳅터에서 나오는 개념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서론에서도 중요한 몇 개의 개념(다양체, 배치, 기관없는 몸체, 리좀, n-1)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내용을 복기하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원
책 제목이 <천개의 고원>이니 고원부터 정리해 볼께요. ‘고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쟁반’, ‘무대의 세트’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질학적 의미로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대지의 운동. 평평하지만 무언가 담겨있는 것이 연상됩니다. 채운 쌤은 여기서 자본주의 체계를 예로 드셨는데요. 채운 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이고, 돈이나 권력처럼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세게 높이 올라 갈 거냐만 생각한다는 거죠.  303쪽을 보면, 고원은 “자신을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연속적인 강렬함”으로 정리 됩니다. (고원은 강렬하지만 높은 산의 이미지가 아닌 넓은 평야정도 인 것 같아요.) 채운 쌤은 문제는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평온을 만드는 것,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우리의 욕망이 어떤 배치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양체
‘multiplicite’ <천개의 고원> 중 가장 중요한 개념
여기서 가운데 pli는 다양한 주름들이 접히고 풀리는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다양하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천개의 고원의 계획은 “구성주의적이다.” 5쪽에 나오죠. 이 책은 전체적인 방식으로 기획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패치워크 식으로 이어 붙여가며 썼고, 일관되게 쓰지 않았습니다(부분 부분을 이어가면서 전체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업).  ‘지층’하고는 좀 상반되는 말 같아요.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 버리”죠. 하나의 딱딱한 체계, 어딘가에 귀속된 체계를 말합니다(뒤에서 다시 설명해 볼께요.)

배치물
배치물은 ‘설비’, ‘치장’, ‘조립’ 미술에서는 ‘앗쌍블라주(이질적인 것을 모아 놓은 것)’라고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물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내’가 있고 ‘내’가 욕망을 특별한 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모든 ‘욕망은 사회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천개의 고원에서도 욕망은 배치 이전에 실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배치 속에서 욕망이 생긴다는 것. 어떤 욕망도 자연발생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가령,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욕망은 자본주의라는 배치 안에서 만들어진 거죠. 내가 무언가를 욕망하고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지만, 실은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배치 안에서 갖는 생각인 거죠.
들뢰즈가 배치라는 개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의 사회성’, ‘비자연발생성’입니다. 욕망이란 주체에 내재하는 힘. 특정한 배치의 산물이고. 주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이런 면에서 책도 배치입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이 책에서 변주가 가능하게 하느냐. 그래서 들뢰즈는 책을 다양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특정한 귀속처가 없다는 것(그러나 우리는 대개 저자가 뭘 말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가족에서의 배치, 학교에서의 배치, 욕망이 구성되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힘의 구성,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배치물은 언제나 역동성을 내포되어 있죠.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바뀐다는 거겠죠. 이런 면에서 배치물은 기관없는 몸체로 향하고 있습니다.

기관없는 몸체
기관없는 몸체, 열린 체제를 말합니다. 늘 바깥에 열려있어서 새로운 이질성과 접하거나, 두 가지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층화 된 관료제 안에서도 꿈틀꿈틀 하는 기관없는 신체가 열릴 수도 있죠. 현실적으로 두 가지의 극단, 하나는 파시즘(모든 욕망을 동일화), 다른 하나는 열린 구조 (이질적인 것이 충만하게 접속하는 시스템)로 나뉘어 작동합니다. 그런데 관료제 안에서도 열린 구조가 있을 수 있고, 규제 없는 곳에서도 파시즘적인 것이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둘이 대립되는 모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업시간에 예로 들었던 자유로운 독신도 지층화 되고 고착될 수 있고. 또 마음의 관료화, 공부도 관료화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다시 14쪽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오죠.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즉 저자의 생각은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사회적'이라고 했습니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책은 바깥과 관계 맺고 있는 고른판입니다(당시 시공간의 분위기, 시대의 경제, 사회, 역사 문화가 저자를 구성하고 있죠).

리좀이란
줄기와 뿌리하고 구분이 안 되는 것. 시작과 끝이 결여된 것. 서로 다른 식물 사이에 연결된 줄기뿌리, 서로 다른 것을 연결 접속해주는 것(프린트로 리좀의 사례를 보여주셨는데 같이 상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을 몇 가지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 책은 세계의 이미지라고 보고 있죠. 중심가지가 있고 그 위에 잔가지가 뻗어나가는, 책은 세계를 모방하고 또 뭘 의미하는지 주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에서 의미를 찾아나갑니다.
어린뿌리, 수염뿌리는 책의 두 번째 유형. 이것은 하나의 중심뿌리만 없지 곁뿌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곁뿌리가 존재하는 이상 또 다시 중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파편화 된 이미지가 강합니다. 단순히 중심이 없는 것만으로는 카오스가 되기 쉽죠. 자기 역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들뢰즈는 이것 또한 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세 번째가 n-1 빼기, 리좀 방식입니다.
리좀 방식인 다양체는 중심뿌리도 아니고 곁뿌리 이미지도 아닙니다. 언제나 –1이죠. 리좀의 특징은 –1의 끊임없는 과정이죠. -1에서 1은 초월자, 중심을 말합니다. n-1 다양체가 움직이는 방식이고, 선험적 전제가 없습니다. ‘언제나 부분들을 통해서 생산하는 전체다’라는 것이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했던 거였죠. <천개의 고원>에서는 n-1로 다시 나옵니다. 분산하고 파편화하고 저항하는 곁뿌리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명령에 종속되죠. 명령과의 관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들뢰즈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리좀은 이것과 다릅니다.

[리좀의 특징]
연결접속과 다질성
중간, 어느 지점에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채운 쌤은 서핑에 비유하셨는데요. 들뢰즈가 좋아하는 운동이 서핑이라고(서핑하는 들뢰즈 모습을 상상하니...ㅠㅠ;). 우선, 서핑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파도 중간에 끼어들죠. 파도의 리듬을 함께 타는 것. 이것을 연결접속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질적인 두 가지를 연결 접속하는 것을 다질성이라고도 합니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분 부분의 접속에 의해서 전체가 생성되는(증식하는) 예로 패치워크를 들었습니다. 조각조각이 따로따로 이어붙일 때마다 전체 그림이 달라진다는 거죠.
“리좀은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운동성을 나타냅니다. 점은 스톱의 이미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면, 생성하는 모든 것은 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거죠.
리좀은 “다양체들의 고른판”이다. 여기서 고른판이란 이질적인 것들이 연결 접속해 들어오면 이것들을 다지는 판을 말합니다. 각주 6을 참조하면, 점착력 있는 콘크리트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점성상태로 이질적인 것을 다지는 것을 고른판이라 하죠. 이런 의미에서 다양체들은 <바깥>, 열려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추상적인 선,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선,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됩니다.

탈기표적인 단절의 원리
기표작용이란 어떤 언어에 대해 중심적인 뜻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개념을 모를 때 네이버를 찾는 이유처럼 말이죠. 들뢰즈는 사전적 의미를 계속 미끄러뜨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리좀은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절되고 뚝 끊기기도 하죠. 언제나 다양체로서만 있는 것은 아니죠. 모든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합니다. ‘리좀은 좋다, 나무는 나쁘다.’ 이렇게 이미지화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리좀은 언제나 나무와 연결될 수 있죠. 존재하는 방식을 리좀이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들은 리좀적이죠. 언제나 지층화 되고 탈주될 수 있기 때문.

지도제작과 전사(복사)
리좀은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카피가 아니라 지도이죠. 카피는 원본과 관계합니다. 지도는 원본을 모르죠. 지도는 내가 땅과 만나는 강렬도와 지층을 겪어 만들어집니다.
원래 내가 있어서 ‘나’라는 것을 카피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원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죠. 내가 무언가와 접속을 통해서 ‘나’라는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사본을 지도로 바꾸는 거죠. 중요한 것은 이분법이 아닙니다. 현실은 항상 두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습니다. 언급했듯이 나무 안에서도 리좀이 생성될 수 있고, 리좀 안에서도 나무 적인 것이 굳어질 수 있죠.  그래서 사본을 지도로! 나무 적인 것에서 리좀 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죠. 모델을 창조하고 끌어다 쓰는 것은 언제나 <모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들뢰즈는 모델은 자기를 카피로서 사고하게 됩니다. 따라서 리좀 방식을 카피하는 게 아니죠. 자기 삶의 기술, 삶의 태도를 변형하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어떤 것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모델로 삼아 따르는 자는 자기를 카피로 사는 자입니다. 리좀적 방식으로 사는 것은 카피가 아니죠. (문제는 지도를 직접 제작하는 것, 천개의 고원을 읽으며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무는 ~이다”라는 규정된 것이 아닙니다.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와 라는 접속사를 조직하는 거죠. 규정될 수 없고 접속을 통해서 작동합니다.  리좀의 특징은 백지 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은 거짓 개념이라고 하죠. 리좀은 이러한 것들을 거부합니다.

 

긴 기억과 짧은 기억, 속도(오후 세미나 때 나온 질문이기도 해서 정리해 봅니다)
긴 기억은 미래에 투사하는 상이든 먼 과거의 기억이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관념을 보여주는 거죠. 긴 기억은 허구나 망상일 때가 많습니다. 그냥 지금의 자기인거죠. 짧은 기억은 지금 내가 변용되고 있는 이 시간, 이 공간, 이 관계가 막 생성되고 강렬도가 있는 중을 말합니다.

서론 마지막에 “중간에 속도를 낸다.”(55쪽)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각주 48을 보면, 불어의 milieu는 중간, 주위 환경, 매질를 뜻합니다.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는 것은 존재는 중간 밖에 없다는 것. 환경이라는 것 자체가 나를 이미 구성하고 있는 것인데, 내가 있고 자연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죠. 나와 환경이 합성하고 있는 것. 따라서 모든 존재는 중간에서 행위하고 있는 자이고, 속도를 갖는 자입니다. 모든 존재는 중간 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속도는 양화로서의 속력이 아닙니다. 0도 속도. 안 움직이는 방식도 속도인 거죠. 중간에서 빠르게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접속하고 합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사유/ 의식을 구분합니다. 사유는 의식과 무의식을 뛰어넘는 것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반성적 사고가 아닙니다. 뇌의 신경구조자체를 변이 시키는 것. 단순히 뇌가 아니라 신체의 문제. 개념을 내 의식 속에 있던 경험으로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사고의 회로 방식을 바꾸는 것. 뇌의 교란이 필요하고 들뢰즈는 이것을 사유라고 합니다. (전 이번 천개의 고원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낡은 생각들과 결별하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쫌~ 제발!!)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21일 수요일에 뵈요^^!!
전체 4

  • 2016-09-13 14:13
    서핑한는 들뢰즈!!! >.< / 쌤, 겹뿌리가 아니라 곁뿌리ㅜ / 대담(함께 읽은 복사물) 중 들뢰즈가 한 말 그대로, 앙띠가 정신분석의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던 것과 비교해 이번 책에서는 언어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시금 기표니 기호니 하는 말들을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어지러웠는데, 다양체로서의 책, 세계의 이미지가 아닌 책을 말하는 걸로 보아, 말하려는 바는 결국 탈기표적 사유/읽기/쓰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이지 사유란 게 대체 뭔지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 2016-09-13 19:00
    "뿌리는 좋고 나무는 나쁘다!" <- 딱 제가 이러고 있는 거 같아요. 들뢰즈는 언제든 중간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꾸 이분법 사이를 오가는 느낌 ㅠㅠ

  • 2016-09-16 13:08
    천개의 고원 수업이 궁금했는데요,
    후기 읽고 나니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쓰시라 고생하셨습니다^^

    • 2016-09-16 16:02
      ㅋㅋ 무슨 궁금증이었나요? 이번에도 역시 어렵지 않을까? 더 어렵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