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9.21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9-26 17:19
조회
465
후기를 미루고 있으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요(ㅠㅠ)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두 번째 고원과 여섯 번째 고원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채운쌤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두 번째 고원]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프로이트의 이름이 언급되는 횟수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역시 정신분석과의 대결이라고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천개의 고원』에 와서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제대로 상대해 주지도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두 번째 고원은 물론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 혹은 조롱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이때 프로이트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은 거의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한 발판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14년에 프로이트를 찾아 온 환자는 반복적으로 늑대들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늑대는 네 아빠’라는 말로 치료를 끝내버립니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늑대 꿈을 꾸는 환자의 별칭)이 “한 살 반에 부모의 성교를 목격하고, 두 살 반에 유모와 단 둘이 남는 경험을 했으며, 세 살 3개월 이전에 누나가 그를 유혹했고, 유모가 거세 위협을 했”(채운쌤 보충자료)기 때문에 오이디푸스화가 진행되어야 하는 네 살 반 이후부터 강박증 증세를 보이게 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가 ‘무리로서의 무의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환자의 꿈에는 한 무리의 늑대가 등장하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한 마리의 늑대, 즉 무의식의 표상으로 치환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늑대를 무의식의 표상, 억압된 것의 대체물로 이해하면 무의식을 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게 됩니다. 늑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환자의 욕망으로 환원됩니다. 채운쌤은 프로이트가 끊임없이 분기하고 접합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리비도를 언어로 붙들어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프로이트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를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이해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여 정상적인 인격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무의식은 ‘무리들의 서식지’입니다. 환자의 꿈에 등장한 늑대는 아빠, 엄마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으며 늑대 자체를 재현하는 이미지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로서의 환자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상이한 강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접근에는 무의식을 다양체로 이해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전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채운쌤은 다양체 개념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주셨는데, 우선 다양체 개념은 단순히 프로이트의 개인적 무의식에만 맞서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은 본질주의에 반反합니다.

들뢰즈가 존재를 다양체로 이해할 때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철학의 신, 칸트의 물 자체 등 잠재되어 있으며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들을 상정하는 방식을 거부합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관시켜서 설명해 주셨는데, 한 사람을 아는 것이 그의 주된 생각을 아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것들, 그가 걷는 방식이나 어떤 사소한 표정들을 통해서라고 하는 게 들뢰즈가 다양체 개념을 통해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채운쌤은 다양체를 산해경에 나오는 ‘형천’을 가지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황제와 맞서 싸우던 형천은 머리가 잘리자 유두를 눈으로, 배꼽을 입으로 삼고 계속해서 황제에 맞서 싸웁니다. 이것을 신체의 다양체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체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인식은 각각의 기관들을 목적론에 귀속 시키게 되죠. 보기 위한 눈, 듣기 위한 귀, 씹기 위한 이 등등. 형천은 이러한 목적론을 거부합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에 의해서 눈이 만들어 집니다. 눈이 없어지면 전혀 다른 방식의 보는 행위가 개발될 수 있겠죠. 채운쌤은 다양체로서의 신체는 과정 속에서 자기의 기능을 실현하고 있는 구성체이고 배치 속에서 변이하는 신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치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한 거리의 변화에 따라서 완전히 상이한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 다양체로서의 모든 것들이죠. 채운쌤은 변신이 모든 신체의 존재론적 지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늑대인간이 꾼 꿈은 늑대가 표현하는 강렬함에 진입하는 경험 자체일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것은 ‘비인간-되기’로서의 다양체적 경험들을 엄마, 아빠, 성욕 등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도 바로 그런 지점이겠죠. 자본주의는 마치 개인들로 하여금 상이한 거리들을 자유롭게 주파하도록 두는 것 같지만, 그 위에 ‘돈’이라는 외부의 척도를 덧씌웁니다. 상이한 강렬함을 체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곧바로 돈에 대한 욕망으로 환원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미 다양체로 존재한다면 ‘다양체가 되자’고 말할 수도, ‘다양체를 추구하자’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다양체와 다양체가 아닌 무엇(유기체)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 다양체를 구분합니다. 이들은 ‘군중’(pack)과 ‘무리’(crowd)를 나누는데 군중은 “연장적, 몰적, 통합적, 조직적, 의식적 다양체(나무 유형)”이며, 무리는 “무의식적, 분자적, 강도적 다양체(리좀 유형)”(채운쌤 보충자료) 입니다. 무리는 군중과 마찬가지로 중심을 가지지만 이때의 중심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무리는 중심이 사라지더라도 즉각적으로 중심을 다시 세웁니다. 이 말은 중심을 갖되, 중심에 의존적이지는 않다는 말이겠죠. 그러므로 무리를 이루는 개체들은 항상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게 됩니다.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바깥을 갖는, 집단에 대해 외부를 갖는 것이 무리 속의 개체입니다.

이에 비해 군중은 “구성원들의 가분성과 평등함, 중앙 집중, 집단 전체의 사회성, 일방적인 위계적 방향, 영토성이나 영토화의 조직, 기호들의 방출”(천개의 고원, 72 )을 특성으로 갖습니다. 군중은 동일성을 통해 작동하고 중심에 의존해 있는 집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리 속의 개체가 패거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였다면 군중 속의 개체는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임을 견디지 못”(채운쌤 보충 자료)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무리와 군중의 이분법에서 무리 쪽을 긍정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러한 구분을 실체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리 속에는 군중이 있고 군중 속에는 무리가 있으며, 언제는 무리는 군중이, 군중은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표방하는 것들이 그 집단의 혁명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집단을 이룰 수 있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다양체적 무의식이라는 관점을 통해 ‘사랑’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들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흔히 떠올리는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이미지는 집단의 규약이나 관습 등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랑에 접근하는데 채운쌤은 이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대상이 속해 있는 무리·집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독립된 개인들 간의 만남이 아니며 각각이 속해 있는 배치, 그 집단 전체와의 마주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마주침은 곧 상대를 그가 속한 무리로부터 탈주시키는 마주침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무리와 무리의 만남인 한에서 양자를 무리로부터 탈주시키는 마주침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상대 안에 감싸여 있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죠.

들뢰즈·가타리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특정한 형태의 경험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여기서 서로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 시키는 다양체 사이의 강렬한 접속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접속의 대상이나 마주침의 외적인 형식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강렬한 마주침은 무리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수립하고 있던 방식을 해체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의 탈개인화란 곧 진정한 고유명을 얻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감싸여있는 것, 진정한 고유명이란 인격, 자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특유한 회로를 벗어날 때 얻게 되는 것이라는 건데... 역시 어렵습니다. 사랑은 탈개인화인 동시에 진정한 고유명을 얻는 과정이고, 무리와 무리의 만남인 동시에 무리로부터의 탈주이고....@_@

[여섯 번째 고원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관 없는 몸체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 중 가장 헷갈리는 녀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나오기 때문에 어딘지 친숙한 기분도 들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모든 말들이 그 앞에서 미끄러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애초에 개념을 독립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배치에 따라서 변주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세미나 때에도 기관 없는 몸체에 대해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의 실체와 같다, 극한이다, 알이면서 동시에 극한이다, 등등 이러저러한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제대로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채운쌤은 기관 없는 몸체를 그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앙토냉 아르또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확실히 무작정 그 개념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보다는 어떤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막막함이 덜한 것 같네요. 아르또는 1947년 11월 28일 라디오 방송을 위해 썼던 원고에서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데 그것은 “심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신의 심판을 기다리는 서구인들의 정신에 대한 혐오에 의한 것이었는데요, 그는 양차대전과 파시즘을 겪으며 그는 “사물들과 말들, 생각들, 기호가 표출되는 표시들 사이에 놓인 단절”을 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아르또는 동양의 사유와 접속하게 되고 특히 『도덕경』의 ‘빔’에 대한 사유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도덕경』의 ‘빔’에 대한 사유는 무가 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퀴의 뚫린 부분, 즉 빈 공간이 바퀴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여된 것’으로 무를 사유하는 방식의 정 반대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로부터 촉발된 아르또의 기관 없는 몸체는 유기체 이전의 신체입니다. 유기체의 차원에서 기관들은 전체로서의 유기체에 의해 목적을 부여받고 그 구조적 통일성에 의해 기능합니다. 아르또는 이러한 유기체적인 것들, 언어 의존적 사고, 목적론, 인간주의와 결별하기 위해 기관 없는 몸체를 선포합니다.

아르또가 혐오감을 느낀 서양적 사고, 유기체적인 사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보면 이것은 생각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일치에는 항상 외적인 척도가 끼어들기 마련이죠. ‘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나 ‘선’, ‘악’의 관념,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르는 척도, 교양 등등. 아르또는 이런 것들을 신의 심판의 여러 가지 양태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민에 의해 아르또는 쉽게 동양적 사유에 접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도덕주의자라고 상상하는 공자님조차도 항상 옳고 그름이 아닌 호오好惡를 강조했을 정도로 동양적 사고는 신의 심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아르또의 기관 없는 몸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는데 저자들이 ‘우울증의 몸체’, ‘편집증의 몸체’, ‘마조히스트의 몸체’를 통해 설명할 때의 기관 없는 몸체는 정상·비정상의 척도에 따른 인간 관념이 적용될 수 없는 차원의 신체입니다. 가령 우리는 흔히 마조히스트를 어딘가 조금 고장 난, 변태 성욕자로 이해합니다. 이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정상성에 대한 인간적 관념이지요.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마조히스트가 고통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만 구성할 수 있는 기관 없는 몸체를 욕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조히스트는 정상, 비정상의 척도와 전혀 무관한, 다양한 힘들이 주파하는 역동적인 공간으로서의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역시 정확히 계산된 방식으로 주어져야 하고, 엄밀한 절차를 따라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가 마조히즘, 편집증, 우울증 등을 얘기하면 어쩐지 자기파괴적인 행위로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왠지 CsO(기관 없는 몸체)하면 마약 이름일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는 일을 구분합니다. 온갖 수단으로 신체의 극한, 유기체로서의 신체가 작동하지 않는 차원에 이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중함의 기예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는 것. 채운쌤은 기관 없는 몸체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질문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당위나 정상, 비정상의 척도도 없이 우리의 쾌락이 구성되는 방식을 보는 것, 이것이 기관 없는 몸체를 만들어 내는 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6-09-27 09:54
    다양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산해경의 '형천'을 보고 아핫~!! 한 경험이 좋았고, 사랑의 정의에서는 뭔가 출렁했었고. 이번주는 또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을까!? 떨려떨려~~^^

  • 2016-09-27 11:08
    뎡말 떨려떨려~~~ / 여러분 담부터는 건화가 늦지 않게 후기를 올려줄 거예요 ㅎㅎㅎ내일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