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0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0-01 17:28
조회
449
지난 시간에는 전 주에 이어 6장 기관 없는 신체를 마저 읽고, 이어 무시무시한 3장 도덕의 지질학을 함께 (맛보기로) 읽었습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이 기대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이유… 대체 3장은 뭔 소리인 걸까요 0.0;

처음에는 뭔 소린가 싶지만 다 읽어놓고 다시 보면 제목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천의 고원이지요.
이번 장에서는 도덕, 사유, 언어 등 우리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귀하고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온 것에 대해 전혀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덕은 전지구적 운동의 산물입니다. 멘틀 위에 켜켜이 지층이 쌓이는 것처럼, 원자들이 모여 돌멩이와 삼엽충과 고사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신체도 인간의 비신체적인 것도 그렇답니다.
가령 스피노자가 무한한 속성을 지닌 우주에서 시작해 윤리학을 썼던 것처럼, 니체가 계보학적으로 탐사해 도덕의 별 것 아닌 기원을 탐사한 것처럼,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가재가 만들어지는 원리로 만들어졌다고 함으로써 반인간/반도덕적 관점에서 인간을 사유하고자 한 거죠.
그래서 ‘지질학’입니다. 인간이 추호도 의심해본 적 없는 자기 철학, 자기의 존립 기반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한 마디로 퇴적과 습곡 운동에 의해서랍니다 ^_^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두 차례의 분절이라 말하는데,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분절이란 곧 기관에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것과 단절지점을 형성하는 것이랍니다.
꼭 인체 기관이 아니어도 접속하고 작동하는 모든 것이 기관/기계인바, 그것에 기능을 부여해 단단하게 굳히는 것이 지층화인 거죠.
이 이중분절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일단 책에서는 첫 번째 분절을 분자적 구성, 두 번째 분절을 그램분자적 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지구가 하나의 알, 질료와 강렬함이 흐르는 CsO라 할 때, 그 위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은 서로 이질적이지 않은 질료의 배합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라 할 만합니다. (전생의 기억처럼 둔스스코투스라는 이름과 함께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ㅋ)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안에 그토록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매순간 존재들이 천변만화하는 까닭은 선택적 질료의 구성이라는 첫 번째 분절에 두 번째 분절이 이어지면서 형태가 구성될 때 발견됩니다.
질료의 선택만으로는 아직 표현의 측면(즉 두 번째 분절)이 구성되지 않으나, 여기에 구조적 질서가 부여되면 그때 비로소 사물들이 꽃피어나는 것이지요.
— 여기서 스피노자적 풍경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능산적 자연 안에서 실체들의 무한한 속성들의 일부를 최대한 펼쳐내는 존재들!
혹은 <화엄경>이 보여주는 찬란한 이미지, 비로자나불의 이 세계 안에서 부처로서 각각 생겨나고 소멸하는 꽃들.

여기서 들뢰즈+가타리의 이 문장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대응 관계도 일치 관계도 없으며 다만 서로 동형성을 전제할 뿐이다.”
내용을 이루는 첫 번째 분절과 그것의 표현적 측면인 두 번째 분절, 이 둘은 동시적이고 동형적이지만 그렇다고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채운쌤은 들뢰즈의 전작 <의미의 논리>를 상기해보길 권하셨죠. 푸코 식으로 표현하면 담론적 측면과 비담론적 측면, 혹은 신체적 측면과 비신체적 측면, 이 둘 사이의 표면에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했지요.(기억 가물가물;)
이번에는 이를 내용의 차원으로서의 분절과 표현의 차원으로서의 분절로 구분합니다.
스피노자가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을 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용과 표현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동시적이라는 것, 일치하지 않지만 동형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이 같은 이미지화는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본질주의적 사유와 아주 다른 효과를 불러옵니다.
플라톤이 말했던 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이 기독교 철학과 맞닿는 부분은 지금 생성 소멸하는 이곳 외에 이곳을 만들고 지켜보는 다른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 아닌 저기, 영원한 것이 머무는 곳, 불안정한 것 없이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있는 그곳.
불안정한 질료의 흐름과 성층화는 이런 이미지를 단박에 차버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층화가 질료에 내재하는 틈과 그로 인한 공명에 의한 작용인 탓입니다.
바깥에서 “지층이 되어라”라고 명령하는 자 혹은 법칙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지층화보다 먼저 존재하는 지층의 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에요.
기관 없는 신체 위에는 어떤 구심점도 없으며, 다만 질료들 자체의 운동이 스스로의 규칙을 갖게 될 뿐이랍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보다 우월하고 보다 본에 가깝다고 말할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나의 사유와 철학이 당신의 그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근거도 없어요.
왜냐하면 각자는 각자의 배치물에 의해 그런 방식으로 통계적 질서와 그램분자적 구조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잘…이 아니라 거의 평생, 매일같이 나의 신념과 앎을 고수하고 주장하는데, 들뢰즈+가타리는 다른 게 아니라 이게 파쇼라는군요. 파시즘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층화의 문제라는 이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주장;;

이를 이해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가 언어에 대해 어떤 고찰을 내놓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이 대~따 어렵습니다. (4장도 어렵다고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일단 지난 시간에 채운쌤이 지층화 개념을 통해 해주신 설명은 (사실 여전히 잘 이해를 못한 듯한 기분이 들지만;)이렇습니다;
“물리적-화학, 지질학적 지층”을 지나 유기체 지층을 이야기할 때는 지층화가 조금 복잡해진다지요.
물리-화학적 차원의 지층과 달리 인간의 지층을 이야기할 때 두 번째 분절은 곧 언표의 집합적 배치에 의한 형상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비로소 ‘의미’의 차원이 도입되는 거지요.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탈코드화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이러저러한 나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설득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분절의 작용… 이라는 것 같습니다 킁.
어... 급작스럽지만… 아마 다음 시간에 여기 이어 더욱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모쪼록 모두들 지각결석 마시고 함께 신나는 고원 수업 함께 들어보아요. 지난 수업 못 오신 분들, 이번에는 꼭 오시길. (이라고 급 마무리를;;)

자, 담 시간에는 3장 마저 진행합니다. 나눠드렸던 강의안 지참하고 오셔요.
후기는 반장 건화. 간식은 이현정+김봉선 쌤입니다.
모두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