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9.2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03 11:21
조회
534
또다시 후기는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엔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채운쌤은 지난주에 못 다한 여섯 번째 고원과 이번에 읽은 세 번째 고원에 대해 강의하셨습니다. 쌤은 들뢰즈·가타리가 거부하는 것이 본질주의라는 점, 이들이 ‘그 자체’나 ‘참된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분기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작하셨습니다. 이들의 책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논증을 하고 있어서 이기보다 이들의 개념이, 그리고 이들의 글 자체가 다른 것과 접속하며 계속해서 변주되고 있는 다양체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러니 모든 개념을 움켜쥐겠다는 무거운 마음 보다는 『천개의 고원』이 지닌 기이한 선율에 몸을 맡기는 경쾌한 태도가 요구될 것 같습니다.

 

-기관 없는 몸체(CsO)

지난 시간에 채운쌤은 ‘기관 없는 몸체’라는 개념을 그 개념을 처음 사용한 앙토냉 아르토의 맥락 속에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 없는 몸체를 이야기 했는데, 이때의 ‘신의 심판’이란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던 것을 뜻합니다. 아르토는 “서구인이 르네상스 이래로 ‘자신의 키 높이로 자연을 끌어내려 자연을 상실케’ 했다고 보았으며, 그 결과 인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축소가 초래되었다”(채운쌤 보충자료)고 보았습니다. 그는 유럽의 문명인들의 병폐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기반을 둔 사유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관념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했고, 『도덕경』의 사유와 만나 모든 생성과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빔’, 즉 ‘도’와 ‘허’의 차원에 대한 사유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기관 없는 몸체’라는 개념은 존재마저도 가능하게 하는 비존재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에게 이것은 차이의 장이며 차이화하는 힘입니다. ‘기관 없는 몸체’, ‘차이의 장’은 어떤 질서나 추상적인 차원을 거부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채운쌤은 계절의 비유를 드셨는데, 계절의 흐름을 보면 거기에서 항상성과 변이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다른 해의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절의 순환은 각각이 조금씩 빗나가는 가운데에서 가능해집니다. 계절의 순환 자체도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축의 기울기의 변화 속에서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죠.

기관 없는 몸체 개념을 말할 때 들뢰즈·가타리는 변이와 항상성을 대립되는 것으로 놓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전체’나 ‘중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에 의해서 ‘전체’와 ‘중심’ 마저도 생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주체’나 ‘중심’, ‘전체’의 해체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체를 새롭게 구성할 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들뢰즈·가타리는 ‘신중함과 정량 투여의 기술’을 강조합니다. 채운쌤은 들뢰즈·가타리의 적을 때려 부수는 종류의 정치성이 아니라 수행적인 정치성을 갖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에게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채로 우리를 작동시키고 있는 습관들을 바꿔내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며, 하나의 불가피한 실험이다. 그것은 당신이 그 실험을 도모하는 순간 만들어져 있지만, 당신이 도모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287)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관 없는 몸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욕망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채운쌤은 들뢰즈(와 푸코)가 어떻게 욕망(혹은 쾌락)을 주체가 느끼는 주관성으로 환원하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에게 습관을 바꾸는 것, 수행하는 것은 흔히 떠올리는 것과 같은 금욕적 고행에 대한 이미지와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수행은 주체로 수렴되지 않는 욕망을 실험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의 관점으로 볼 때 수행, 수련을 오히려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쾌락을 욕망이 도달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 내재성의 흐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욕망, 쾌락이 재영토화되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채운쌤은 동양의 양생술의 핵심은 목적의 도달을 늦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생술을 들뢰즈·가타리적 관점으로 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관 없는 몸체를 구성하는 일이 ‘지층을 주시하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자기가 서 있는 기반을 무턱대고 무너뜨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기체 이전의 신체를 실험하는 것은 신체를 버리는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주시하기’는 무엇일까요? 채운쌤은 주시하기란 다른 상태, 다른 상황에 놓일 때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지층은, 그것을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말하든, 신의 심판이라고 말하든, 습관이라고 말하든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 특징이 아닐까요? 이것은 마치 영혼처럼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과의 마주침 없이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채운쌤은 이것이 조금씩 공기가 달라짐을 감각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양생술에 관한 책이 아니라 사회체와 욕망, 정신분석 등을 분석하는 책을 쓴 것도 그런 이유겠죠. 이들이 ‘수련’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답적인 가르침이 아닌 것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이루고 있는 장을 새롭게 감지하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관 없는 몸체에는 암세포와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파시즘적인 기관 없는 몸체도 가능합니다. 채운쌤은 화폐의 기관 없는 몸체도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유주의 금융경제는 실물경제로부터 화폐가 완전히 탈코드화된 양상을 보여줍니다. 기관 없는 몸체는 지층보다 무섭게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층을 더욱 세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난 시간을 복기하면 들뢰즈·가타리는 존재를 다양체로 이해합니다. 이때 우주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됩니다. 다양체는 다양성들 자체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채운쌤은 『천개의 고원』의 다양체 개념이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계 개념의 변주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기계와 『천개의 고원』의 다양체 개념에는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것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이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적 관점을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채운쌤은 이 질문이 스피노자와 접속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수경쌤이 쓰신 것처럼 스피노자는 각각이 무한하며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표현되는 유일하고 무한한 실체라는 관념으로부터 인간을 새롭게 규정합니다. 이때 인간은 실체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으로 표현된 양태입니다. 놀라운 것은 스피노자가 실체와 속성, 양태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윤리론을 말하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도덕, 윤리는 흔히 인간을 출발점으로 두고 논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에서부터 인간주의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인간/비인간, 정상/비정상, 선/악, 미/추 등의 인간적 관점에 의한 대립 쌍을 만들게 됩니다. 노자는 어떤 고매한 뜻을 품고 있는지와 별개로 仁, 義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를 세우는 것 자체를 화근으로 보는데, 어떤 점에서 스피노자와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노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3장(기원전 1만년-도덕의 지질학)에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 그리고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언어행위를 지구의 관점에서 보고자 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모든 것들을 퇴적작용과 습곡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층화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질료들이 접속하고 결합하고 밀어내는 등의 운동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온 지구의 몸체, 준안정적 몸체가 바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지층화입니다. 주체가 주체화의 과정 속에서 드러난 준안정적 상태인 것처럼 지층 역시 지층화의 과정 속의 준안정적 결과물입니다.

지층화는 이중분절을 통해 진행됩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의 ‘예절’을 예로 드셨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예는 곧 우리의 신체를 꺾는 과정과 같습니다. 흐물흐물한 신체를 분절하는 것. 예절에는 두 가지 분절이 내포되어 있는데, 첫째로 신체 차원의 분절입니다. 예절은 우리에게 상황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죠. 서양의 매너와 마찬가지로 흐물흐물한 상태의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게끔 마디화합니다. 그리고 예절은 또한 ‘인간다움’을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절해내는 작용을 하죠. 이것은 신체와 정신의 두 층위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내용과 표현의 두 층위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층화가 모든 것들에서 동일하게 이중분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퇴적작용과 습곡작용, 신체의 분절과 정신의 분절, 내용과 표현 등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같은 원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3장의 후반부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내용과 표현의 두 층위를 이야기합니다. 이들이 이때 ‘내용과 형식’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내용과 표현 각각 나름의 실체와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푸코의 논의에서 죄수가 탄생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한 명의 죄인이 탄생하는 데에는 죄수복을 입고 수형생활을 하는 내용의 측면과 사법담론에 의해서 죄수로 판결 받는 표현의 차원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죄수의 탄생은 내용과 표현 어느 한 쪽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두 층위가 동시에 작용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까 내용과 표현은 스피노자의 속성개념처럼 상호 독립적이지만 또한 일체를 이룹니다.

이것을 언어에 놓고 보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은, 무규정적 소리에서 언어를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체, 음절을 구성하는 분자들의 결합과 의미를 발생하게 하는 문법적인 구조가 동시적으로 형성될 때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유기체의 탄생, 신의 심판을 이러한 이중분절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중분절(내용과 표현의 두 층위)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가 끝났습니다. 3장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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