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사오정의 관찰 일지] 혜림 보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8-30 18:14
조회
302
8월 26일 월요일 아침, 불교 세미나를 하려고 자리에 가방을 놓자마자 옆방에서 스피노자 세미나 준비 중인 혜림이가 나왔다. 미간을 찡그리고 뭔가 먹구름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는데, 입에는 애기 주먹 만 한 간식을 물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일단 뭔가 먹고 있을 때는 긍정적이다. 언젠가 부터 아침에 날씨를 살피듯 종종 기분을 살피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혜림은 그 중 한 명이다. 대부분은 흐리고 아주 가끔 맑다. 신기한 점은 그 상태가 오래 가진 않는다는 거다. 좋게 말하면 높은 산의 급변하는 날씨 같고 다르게 말하면 형광등 같다.
나 같은 경우 오직 내 중심적으로, 내 뜻에 맞지 않으면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데 비해 혜림은 주변 상황이나 사람과 더불어 기분과 표정이 확확 달라진다. 불교 수업이 끝나고 공부방에 갔더니 혜림(규문 톡톡 김부장)이 건화(정부장)와 함께 ‘규문 톡톡 연재’ 진행 상황 및 앞으로 계획 등에 관해 채운샘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옆에 규창이와 민호도 있었는데, 지난 주 연재 글을 못 올린 민호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혜림의 표정이 더 심각했다. 노트북에 뭔가(아마도 이번 주 연재글?)를 쓰다 듣다 하던 규창이와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거나 주변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곧잘 의견을 내는 건화 옆에 혜림은 예의 표정으로 연필을 꼭 쥐고 수첩에 뭔가를 간간히 적고 있다. 그러다 이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눈가와 볼이 발갛게 상기 되어 곧 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채운샘의 말씀이 끝날 때 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생긴 건지 ‘팥’을 더해 농담을 던진다. 혜림의 팥에 관해서는 뒤에 이야기 하고 암튼 방금 전 심각한 표정을 무색해지게 하는 혜림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혜림이를 중심으로 보다 보니 괜히 불안불안 했었는데, 맞다, 그 날 분위기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불교 수업을 듣는 윤지샘을 따라 연구실에 놀러온 초등 6학년 이우(청소년 한문 교실 듣는)의 증언을 보탠다. “언니 오빠들이 채운샘한테 '사랑의 맴매' 맞고 있어”

연구실에서 혜림은 ‘팥쥐’라고 불린다. 자주 ‘심기가 불편하심’ 상태가 되곤 하는 성격과 싫은 건 탁 쳐내버리는 못됨을 응축한 별명이다. 동화책에 나오는 기세등등한 팥쥐처럼 엄마 옆에서 연구실의 소심하고 느린 콩쥐들을 짓궂게 쪼기도 잘하기 때문이다. 그런 팥쥐를 둘러싼 무수한 말말~중에 대표적인 것 두개만 소개하자면(숨이 넘어갈 만큼 웃다가 다 잊어버렸다) 언젠가 팥이 한껏 찬 혜림이 멀쩡히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 모두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서 유래한 ‘팥시스트’, ‘팥시즘’부터 그런 혜림에 대해 채운샘의 애정어린 시선에서 나온(?) ‘팥프리카’까지. 팥의 변용은 무궁무진하다. 이에 대해 혜림은 스스로 ‘팥죽’을 써 주겠다고 받아쳐주니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와중에 민호의 깨알 같은 캐치로 ‘팥 앙금 생성 중’이라는 놀림까지 받으며 팥쥐는 오늘도 변신 중이다.



연구실에 있으면 불안한 팥쥐의 표정 덕분에 조마조마 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웃게 된다. 타고난 팥쥐력을 인정(?)받아 요즘은 ‘규문 톡톡 연재 관리 부장’을 맡아 활약 중이다. 주 업무는 글쓰기와 과제 진행 상황과 근황 체크다. ‘너 책 다 읽었냐?’, ‘글은 다 썼냐.’ 부터 시작해서 적절하게 팥을 버무려 찰떡 같이 재촉한다. 그런 혜림이 요즘 가징 팥이 가득할 때(심기가 불편할 때)가 바로 본인의 연재 글을 쓸 때이다. 혜림이는 스피노자를 배우고 글을 쓰는 절차탁마S와 니체를 읽으며 글을 쓰는 절차탁마NY, 예술인류학을 듣는데 그 중 스피노자의 개념을 통해 자기를 되묻는 글을 기획 중이다. 수욜이 저녘, 스피노자를 같이 듣는 혜원, 정옥샘 그리고 정부장과 함께 글을 보던 중이었다. a4용지 사면을 가득 채운 혜림의 글과 뭔가 심각해보이는 표정. 단단하게 뭉쳐서 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요리조리 주물주물 간질간질 하면서  말랑하게 만든다. 어느새 심각한 듯 보였던 혜림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 한 장면.

“솔직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게 치명적이야. 개념이 틀렸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솔직하게 쓴다고 쓰는 데...”
“자, 이거 2페이지 한 번 봐봐. 자기가 쓴 문장 하나를 책임지고 쓰지 못하고 있잖아. 우리가 다 책임지지 못하긴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이야 라는 느낌이 나야하지 않을까. 다음, ‘욕망을 모방한다’ 이거도 모방하지 않은 진정한 욕망을 찾자는 말처럼 들려…”
“글을 쓸 때 ‘(내가 무언가를) 모른다 그래서 다시 봐야겠다’라는 태도와 ‘모르지만 퉁치고 가야겠다’ 할 때 다른데, (후자일 때) 이런 글이 나온다고 생각해.”
“하....”
“일단 서론을 집중해서 써봐. 거기서 뭘 질문 할 건지, 그런 방식이 어떤 모순을 겪고 있는지 자기만이 겪는 방식을 써야지. 안 그럼 너무 빤한 글이 돼.”
“지금은 너무 익명 글 같애. …‘지금까지 내 뜻대로 되었는데 내 인생 최초의 실패야~’ 같은 느낌라구.
“어..일단 빠르게 버무려서 쓰려고 했던 거 같애. 출발점 아는 척 하고 쓴 거지ㅎㅎ 이 코멘트 받고 다시 글을 쓸 때 걱정 되는 건 인식 구조를 들여다보라는 게 잘 이해가 안 간다는 건데.…이 사항이 얼마나 엄중한지 (지금 쓴 글을) 채운샘에게 보낼께. 코멘트 받은 거 정리해서…”

사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전의 친구들의 코멘트에 있었다. 가만 보면 팥쥐도 나처럼 잘 안 듣다. 그러나 비슷한 듯 하면서 또 다른.

엄중한 사안이라고 강조하던 혜림이는 다음 날 목요일 아침 글쓰기 합평 때 까지 채운샘에게 글을 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역할이 있기 때문에 못한 건 못한 거고 팥 뿌릴 때는 확실히 뿌린다. 공부하고 싶다는 동기를 확장 시키는 지점에서 막힌 민호의 문제에 대해 “…너가 혼자서 안 풀리면 누구든 붙잡고 가서 캐물어, 이해 될 때까지. 왜 그러지 않고 혼자 있는 거야?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민호는 어제는 건화랑, 오늘은 채운샘과 이야기 했다. 동기를 확장하는 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공부에 대해 다시 질문하면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한편으로 놀랐던 건 혜원이의 글쓰기 방향을 이야기 할 때였다. 변용하지 못하는 신체에 대한 자각을 했고 그에 대해 장자와 연결해서 글을 쓰겠다는 혜원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이 터진 혜원이를 보며 모두들 어설픈 위로보단 놀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누군가 혜원이가 왜 우는 거냐 물었다(나도 잘 몰랐다). 혜림이 ‘정해진 틀 안에서는 맞춰서 반응할 수 있는데, 전혀 낯선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니까 눈물이 난 거지’라고 말했던 거 같다. 나는 나와 연관 된 이야기에 한에서는 없는 걸 만들어서라도 듣는데, 혜림이는 자기 이야기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잘 보고 듣고 이야기 하는 거 같다.


같은 날 혜림은 자신이 민호에게 말한 거처럼 했다. 요즘 규문의 도서관 ‘규문각’에서 집필 중이신 선민샘께 가서 코멘트를 받았다. 팥 뿌리는 게 밉지 않은 건 이런 혜림의 모순적인 의지(?) 때문이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 솔직하지 않으려 할수록 투명하게 드러나는 혜림의 특성 때문에 ‘크리스탈’이라는 별명도 있었지.
전체 2

  • 2019-09-02 21:01
    숨 넘어가게 웃다가 별명들을 잊어버렸다니, 이래서 웃는 게 위험하군요!
    저~~~~번에 점심을 먹다가 어떤 이유로 혜림누나가 민호한테 한창 팥을 뿌리고 있었는데, 민호가 왜 이렇게 아침부터 팥죽이 되셨냐고 받아쳤던 게 기억나네요.
    민호 짜식이 거의 공장 찍어내듯 팥 시리즈 별명을 막 뱉어내더라고요. ㅋㅋㅋ 팥토스, 아이팥, 팥충류, 팥티큘러 등등 연구실에서 민호와 혜림누나의 대화를 잘 듣다 보면 팥 시리즈 별명이 계속 생겨납니다.
    그러고 보면, 혜림누나 관찰일지는 민호가 기막히게 쓸 수 있었을지도?

    • 2019-09-02 23:49
      민호가 기막히게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영샘도 나름 기막히게 썼는데요. 귀가 막히니 기가 막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