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52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20 15:33
조회
3513
기분 좋은 개강일 지나 모두들 복습과 예습은 하고 계신지요^^
지난 학기에 비해 학인이 많이 늘어 공간도 책상도 모자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요.
앙띠와 함께 처음으로 규문에 발을 들여놓으신 아홉 분의 선생님들을 모두 환영 또 환영합니다. 앞으로 지각이나 결석시 혹은 기타 문의사항이 있을 때 반장인 제게 연락해주심 됩니다.

2시 세미나까지 참여하는 사람으로서는 세미나 없이 인트로 강의만 있는 개강일은 역시 잔치날입니다.
그날도 가뿐하게 강의를 들으려 했는데, 푸코의 서문은 읽고 또 읽어도 깊으면서 쌈박(…응?)한데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프로이트맑스주의를 간략하나마 짚어가다 보니 이건 뭐 시작부터 아주 묵직했던 것 같습니다 ^^;
거기 더해 가타리와 만난 들뢰즈가 처음으로 사용한 ‘기계’ ‘도주선’ 등 생소한 개념들을 선보이는 탓에, 들뢰즈와 처음 만나시는 분들은 아무래도 힘드셨을 수도.
다음 주부터는 함께 책을 읽어나가며 정리하고 질문을 주고받게 될 테니, 조급함 없이 그저 성실히 읽고 와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시간 공지 전 오늘은 그저 환기 차원에서, 지난 수업에서 나왔던 주요 개념들만 함 다시 정리해볼까요. 많은 이야기들 중 기계 / 도주선 / 분열증 / 욕망 , 이렇게 네 가지만 환기해봅시다.

가나다 순으로 하고 싶지만 욕망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시작이 힘들 것 같으니 일단 욕망부터 보죠.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하길 욕망은 결여에서 온다고 합니다. 이게 없으니까 욕망한다고.
가령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커서도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맨다, 혹은 가족에 집착한다, 이런 식.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욕망은 늘 충족을 지향하는 것이자 동시에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고 맙니다.
완전한 사랑을 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런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 그건 무시무시한 욕망의 힘 탓이 되는 거지요.
이와 달리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을 생산의 관점에서 사유합니다.
욕망은 생산합니다. 욕망은 특정한 대상을 생산하고 주체를 생산하고 사회체를 생산합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호도된 민중이 그릇된 선택을 했다, 억압에 의해 가로막히고 일그러진 욕망이 참화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미 17세기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인간은 예속을 욕망하는가?’
그러니까 인간은 예속되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을 욕망하기에 이렇게 사는 것, 심지어 자신의 예속을 욕망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스피노자,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질문은 정치적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속아서 혹은 억압받아서 자신을 닦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특정 욕망을 내면화함으로써(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함으로써) 자기 계발 주체로 거듭납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치스를 생산한 것은 독일 시민들의 욕망이었고, ‘경제대통령’ 이명박과 ‘박통’ 박근혜를 생산한 것 한국 시민들의 욕망이었죠.
앞으로 들뢰즈+가타리가 욕망을 키워드로 자본주의와 분열증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어떤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틀지 함께 기대해봅시다.

두 번째, 기계. 이 말은 한 번 들으면 영 잊히지 않아요. 사람이 기계이고, 국가가 기계이고, 자연이 기계라니. 내 입이 기계이고, 내 눈이 기계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고?
어제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이 개념은 욕망의 복수성을 표시한답니다.
위에서 확인했듯 욕망은 결코 대상이나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쟁취해야 하지만 늘 결여된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분기하고 흐르고 작동하는 것, 그러면서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작동될 수 있다는 면에서, 그 접속 능력과 작동 능력에서 들뢰즈는 기계 개념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무엇과 어떻게 접속하는지에 따라 인간은 다양한 기계로 변신해 작동합니다. 우리는 공부-기계가 되고, 산책-기계가 되고, 키스-기계가 됩니다.

세 번째, 분열증. 앞으로 책을 읽으며 더 이해해야 할 것 같은데,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분열증 환자를 생산하며 더 나아가 분열증을 토대로 성립되었답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흐름과 통일을 해체시키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흐름을 다시 다양하지만 일정한 회로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분열증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며 이를 상품 소비와 유행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해도 좋을지는 차차 생각해보고 싶네요)
아무튼, 이와 관련해 들뢰즈+가타리는 분열증 환자가 아니라 분열증적 주체에 대해 논한다는군요.
분열증에 걸리는 게 아니라, 분열증적 방식을 삶에 도입하는 문제가 사유되어야 한답니다. 환자가 아니라 새로운, 분열증적 주체 되기. 능동적으로 분열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 되기. 접속하고 도주할 수 있는 기계 되기.
…음, 앞으로 차차 이해하도록 해봅시다. >.<

마지막으로 도주선. 설명 듣기로는 도주선을 발명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랍니다.
생각해보면 때때로 우리는 정말 파시스트가 되곤 합니다.
고도의 기억력과 언어능력을 소유한 인간은 매일매순간 자신의 회로 안에서 세계를 일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하고 이를 사용합니다.
정도 차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영토화, 코드화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방식의 도주선을 발명하지 않는 한, 그래서 인간은 어느 정도 교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답니다.
나의 회로는 내 앎과 경험만을 알고, 나의 욕망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그러니 내가 혁명투사가 되었던 승려가 되었건 장터 아낙이 되었건 간에 나는 파시스트입니다.
마치 나치스에게 표를 던진 독일 민중처럼, 우리 역시 권력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 것으로 만들면서, 스스로의 예속을 욕망하게 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파시스트로 만드는 결정적 사건이 됩니다.
파스시트는 어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편집증적 욕망이랍니다.
도주선이란 바로 이 편집증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영토화된 것으로부터 달아나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일단 이해해두렵니다. ^^

다음 시간부터, 드디어 시작입니다. 1부 전체 읽어 오시고, 세미나 참가자들은 꼼꼼 요약이 담긴 과제 들어 2시에 만나는 걸로.
간식은 고지영쌤과 주진희쌤께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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