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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톡톡 3강 풍경, 그것이 바로 나다 : 빈센트 반 고흐 후기

작성자
지니
작성일
2016-06-21 03:59
조회
3856
 

강의 세 번째 시간, 빈센트 반 고흐였다. 너무 익숙한 이름이지만 왜 그가 그렇게 유명한 건지, 그의 그림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사실 어떤 그림을 앞에 갖다놔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아마 그나마 ‘좋네~’라고 작은 소리로나마 말할 수 있다면 나의 그 좋음은 십중팔구 ‘익숙함’의 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 세 사람의 화가를 만났다. 마네, 고야, 그리고 고흐. 이들의 그림이 나에게 가한 자극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 데, 익숙함과 반대되는 ‘불편함’이었다. 이런 불편함은 사실 상,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해오는 몇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어느 텍스트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으니 오히려 불편함이 익숙한 것이 되었다고 할까. 처음에는 이 불편함들의 정체를 밝혀야 뭐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불편함을 일으킨다고 내가 여겼던 그 대상들을 보는 ‘다른 시선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 불편한 감정이 사라진다고 곧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시선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건 익숙함이라는 게 습관이며, 감각·지각도 신체의 습속이라는 것. 참 신기하게도 이것만 알아도 불편감이 사라지고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마네 그림에 대한 불편감이 마네를 보는 보들레르의 시선을 만나면서 마네의 그림을 더 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다. 그를 보는 다른 시선은 앙토냉 아르또다. 사실 반 고흐와 그의 작품은 불편함이라기 보다는 익숙함일 것이다. 익숙함의 정체는 물론 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일 것인데. 그랬다. 그가 그린 것은 단지 자화상이었고, 해바라기였고, 구두였고, 씨앗뿌리는 사람들이지 않았던가? 그의 그림들이 주는 정서는 물론 비슷한 대상들을 그린 다른 화가들과 같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좀 더 묵직하달까, 붓질에 힘이 느껴지고 색깔이 무척이나 정렬적이랄까? 그런데 그런 건 기술적인 것 아닌가? 단지 그의 기법, 그의 취향 뭐 그런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채운 선생님은 앙토냉 아르또의 ‘잔혹극’을 가져와서 반 고흐의 그림을 보는 다른 시선을 소개해 주었다. 잠깐 맛본 잔혹극에서는 조명의 색깔, 방향, 속도 같은 것을 통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그것도 매번 달라지는 신체, 부분 신체들의 이미지가 난무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신음, 고함소리들. 거기에서 어떤 스토리를 찾는다거나, 의미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아르또가 ‘잔혹극’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의미화된 인간의 육체의 파열”, “중성적, 문자중심적, 표상적 인간의 사유구조”였다. ‘잔혹’이란 자기동일적 신체의 파열, 의미없음에의 직면 자체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변용의 작용들은 모두 잔혹하다. 중심을 빼앗아 안정된 지반을 흔들고, 익숙한 의미작용을 부수기 때문이다(채운 강의안).” 그리하여 잔혹극에서 보여지는 것은 다만 ‘힘’, ‘힘의 작용들’ 뿐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을 힘의 작용 차원에서 본다. 구두라고, 씨앗뿌리는 사람이라고, 해바라기라고 본 것은 그것들과는 어쩌면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반 고흐는 그렇게 보여지는 세계를 가능하게 한 힘들을, 그 작용을 짤막한 선들로 색채로 표현했다.

들뢰즈에게 잠재성의 장, 선험적 장으로 표현된 그 세계를 반 고흐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었을까? 이 선험적 장이 현실화된 세계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반 고흐를 신들린 광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 고흐는 더 많이 관찰했고, 더 오래 집중했고, 자신의 감각을 벼렸다. 똑같은 것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 자신이 감각한 것을 정확하게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마네의 그림이 보는 자를 한 자리에 서서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반 고흐의 그림은 보는 자를 끌어당겨 그림 속에 위치시켰다. 고야의 그림은 고정되고 규정된 현실 저편이 실재함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주로 이중화되고 동떨어진 두 세계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반 고흐의 그림에는 하나의 세계, 현실화된 힘의 세계만 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해바라기가, 구두가 존재하지만 구체적 사물로서가 아니라 힘으로서 존재한다.

반 고흐가 쓰는 색들, 굵고 가는 선들은 그가 보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그 자신이 창조한 기법이다. 그 기법이란 자신의 느낌, 감각들을 정확하게 표현해내려고 그가 애써 애써 찾은 것들이고 , 그 여정 자체가 화가로서 반 고흐의 삶 전체였다.

글 쓰는 자가 글쓰기의 기법을 달달달 숙지하고, 그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취향의 글이 있다고 한들 쓰고 싶은 대로 써지지 않듯, 한 화가가 힘들의 작용을 그렸다면 그것은 그의 기술이나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화가 자신이 자기 신체를, 세계를 힘의 작용으로 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감각하는 바를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표현 자체가 불가능해지니 두 가지가 다른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글이든 그림이든 그것은 세계를 감각하는 그 사람 자체이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반 고흐가 그린 것은 “외부의 풍경도, 반 고흐의 내면도 아닌, 변용된 신체성이었다(채운 강의록).”는 말이 너무나 명확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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