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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6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03 14:45
조회
570
악 = 사유의 진부함

이번 시간에는 니체의 <서광>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쌤의 강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악의 평범성은, 잘 알려져 있듯이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술하며 도출한 개념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친위대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 심문을 지켜보며 그에게서 적극적인 악이 아니라 진부함banality, 놀라울 정도의 평범함을 발견합니다.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나치는 순수한 악, 절대 악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비정상적인, 괴물, 악마 등으로 그려집니다(마블 영화의 하이드라). 그런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악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것은 어떤 적극적인, 남다른 악의 징표가 아니라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 그리고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습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한나 아렌트, 채운쌤 강의자료 재인용)

그러니까 ‘악’이라고 할 만한 어떤 적극적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투어로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무능이 곧 악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의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무능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정상성이고 평범성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때의 ‘무능’이라는 말은 그의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사유의 길을 내지 못함을 뜻합니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미 홈이 파여 있는 길로밖에는 사유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종류의 무능함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괴물 같은 짓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사실 누구보다 평범한 인간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말 사유의 무능 외에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니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실존은 고통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우리를 해체하는 마주침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자체가 인간을 병적으로 만들거나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사유의 진부함에 의해서가 아닐까요? 어느 한 지점에 고착화되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스스로의 고통을 해석해내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를 진정 병적으로 만드는 것은 병 자체가 아니라 ‘병에 대한 생각’이라고 니체는 이야기했습니다.

도덕적 편견

그런데 사유의 무능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니체에게 이것은 도덕과 긴밀하게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도덕이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요?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숙고합니다. 물론 이때 니체가 인간적인 것을 숙고한 것은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을 벗어난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이상학적 관념들에 의거하지 않고 인간의 기원을 묻는 것. 이미 인간적인 전제들로 점철된 형이상학적 개념들 바깥에서 인간에 대해서 묻는 것. 이것은 삶을 삶 자체로 이해하기 위한 니체의 방법입니다. 니체는 <인간적인>에서 인간적인 것의 핵심에 도덕감정이 놓여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리하여 니체는 <서광>에서 도덕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서광>의 부제는 ‘도덕의 편견에 대한 사유들’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특정한 도덕적 편견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정정하기 위한 글을 썼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는 도덕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는 우리가 도덕적,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는 가치평가의 전제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니체는 도덕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믿음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악의 평범성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니체에게 사유의 무능이란 도덕을 성립시키는 가치기준을 의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질문하지 않고서는 평범한 생각의 바깥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도덕의 전제를 질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조금은 파시스트가 되어 있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걸까요? 칸트는 자연과 역사 속에 도덕의 견고한 근거가 배제되어 있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도덕을 신뢰했습니다. 루터는 세계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의, 그러니까 인간적인 것의 전제에 대해서 질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평범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덕이 인간적인 것의 핵심이라는 니체의 통찰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도덕에 대한 신뢰 위해 스스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니체는 만물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정오의 시간을 기다리며 <서광>을 썼습니다.

계보학

니체는 스스로를 ‘지하에서 작업하고 자’라고 소개합니다. 니체는 표면에서 자명한 것으로 드러난 것들의 지하를 파내려갑니다. 그러나 그가 파내려가서 발견하는 것은 묻혀있던 진실이 아니라 ‘근원의 무의미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순수한 기원, 아담과 이브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은 근원에 대해 무지할 때 입니다.

근원에 대한 통찰과 함께 근원의 무의미성이 증대된다. 이에 반해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 즉 우리 주위의 것들과 우리 내부의 것들은 옛날 사람들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색채와 아름다움, 그리고 수수께끼와 의미의 풍요로움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한다.”(<서광>44)

그리고 근원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한 니체의 연구방법이 바로 계보학입니다. 그런데 니체에게 파내려간다는 것, 즉 깊이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니체는 관념의 깊이, 의식의 깊이를 비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높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어떤 실재의 의미를 깊이 내려가서 찾으려고 하는 것, 혹은 높이 올라가서 찾으려고 하는 것을 니체는 비판합니다. 모든 것은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에 대해서 깊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해석에 도입한 외재성 때문입니다.

니체의 해석은 해석대상을 갖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해석의 대상은 없습니다. 그저 해석들이 충돌하는 표면이 있을 뿐입니다. 푸코는 “해석에서 수립되는 설명관계는 폭력관계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해석이란 이미 해석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새롭게 출현시키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니체에게 해석되어야 할 저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지하로 내려가야 했던 것은 순수하고 내재적인 탐구라는 기만에 어떤 외재성을 도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표면의 밑으로,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온 니체는 깊이라는 것이 순수하고 내재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하나의 게임이자 표면에 잡힌 잔주름”일 뿐이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니 니체에게 깊이는 깊이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표면의 것에 외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표면에 이르기 위해 깊이 내려가는 일, 이것이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입니다.

도덕적 선판단에 대한 전투

이러한 계보학적 방법으로 니체가 밝혀내는 것은 도덕의 수치스러운 기원입니다. 그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도덕적 판단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떤 인간의 행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런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주목한다. 우리는 이 행위를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본다. 우리는 이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를 그의 의도로 간주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갖는 것을 그의 지속적인 성질로 간주하며, 이때부터 그를, 예를 들어 ‘유해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론은 삼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략) 모든 도덕의 기원이 다음과 같은 혐오스럽고 비소한 추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한 것(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선한 것(그 자체로 기분을 좋게 하고 유익한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자체로 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이익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우호적인 것이다.’ 아, 수치스러운 기원이여!” (<서광> 102 채운쌤 강의자료)

여기서 무너지는 것은 도덕의 고귀한 기원이자, 도덕이 인간에게 특유한 어떤 것이라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야기했듯이 니체가 도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도덕을 연금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정합니다. 그 근거들, 전제들을 부정하지만 “이 전제들을 믿고 그것들에 따라 행동했던 연금술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윤리적 행위들은 계속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다만 해체된 근거 위에서, 전혀 다른 근거 위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이때 도덕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인간성이나 선, 악과 같은 어떤 보편개념 바깥에서 윤리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탄탄한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 아닌, 매번의 실험을 지속하는 것.

다음 주 수업은 <즐거운 학문>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간식은 금강석 선생님, 최희진 선생님, 배정원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다음 주에 봬요 :)
전체 3

  • 2016-11-03 15:52
    히틀러 치하의 아이히만이 보여준 행위에서 악이 얼마나 진부하게 평범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 .. .. 그런데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갔다고 하여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제 사유를 조금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너무 앞으로 나가버린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지행합일의 삶을 산다는 것 너무 어렵지 않는가요. 목숨을,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 2016-11-04 01:49
    고착화된 사유가 악이라면 흔히 우리가 믿는 선과 악에 대한 잣대 역시 니체가 말하는 '악'일지도 모르겠네요! 윤리적 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가치, 통념, 도덕의 전제를 해체하고 난 이후에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은 어쩐지 공자와 연결되는 것 같네요 ㅋㅋㅋ 근데 공자는 윤리가 기능하지 않는 난세에 살아갔기 때문에 '인'을 강조한 철학이 탄생했지만, 니체는 무엇을 봤길래 그토록 예민하게 살았을까요?

  • 2016-11-04 22:30
    니체에 의하면 나는 가장 악하고 동시에 약한 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져요.. 어리석은 것이 죄가 맞네요.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