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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화려함 뒤에 오는 공포영화의 몇 장면' - 주역수업(3.19)을 듣고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03-31 22:00
조회
838
모두 안녕하셨나요! 한 주를 거르고 나니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고 새삼 반갑습니다;; 허허;;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진다 하여 의욕에 넘쳐 방방 뜨고 다녔더니, 돌아다니기가 무섭게(시동만 좀 걸었을 뿐인데) 또 병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일주일을 통째로 앓고 다시 놀라 몸을 사리고 있는 윤몽입니다. 여기에도 묘한 주역의 이치가 숨어있군요. 저질체력을 잊어버리고 까불기 무섭게 몸이 아픕니다. 날 따뜻한 줄 알고 얇게 입고 돌아 댕기면 바로 꽃샘추위를 만나 감기에 걸리고요.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조심, 조심이네요.

 

지난 토요일의 후기는 몽삼이에게 토스를 하고요. 저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반가울 수도 있는 지지난 주의 괘 이야기를 짧게나마 해보려고 합니다. 가물가물해진 기억이 선명해질 수도 있고요!!

 

자, 비괘(賁卦)입니다. 비괘는 합한다(合)는 뜻을 지닌 서합괘(噬嗑卦)의 바로 뒤에 오는데요. 서괘전에서는 이 순서를, 만물들이 점차 모이게 되면 그냥 무질서하게 뒤죽박죽 모여 있을 수만은 없고 따라서 어느 일정한 질서나 모양(무늬==)’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해요. 비괘는 ‘꾸밀 식()’ 의 뜻을 지닌다는 거죠. 사람들이 모이면 상하의 위계가 생기고(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니까요), 만물들이 모이면 앞뒤로 나란히 순서가 잡히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어요. 이를 꾸민다는 의미의 ()’이라는 글자로 표시했는데,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문명이고 질서이고 제도인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비는 형통하고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약간이롭다(賁亨 小利有攸往)”는 말인데요. 왜 그냥 이롭거나 크게 이롭지 않고 ‘약간’ 이롭다(小利)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바탕)과 꾸밈’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어떤 것의 기본이 되는 것, 본래의 바탕, 순수하고 소박한 것, 꾸며지기 전의 날 것, 있는 그대로의 것을 , , , 등의 글자로 표현한다면 이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본바탕에 더하여 꾸민 것,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가식적인 것, 기본에 추가로 더하여진 것을 , , 등으로 나타낸 거예요. 그래서 비괘가 상징하는 문물제도와 질서는 그것이 없는 시대보다 분명 화려하거나 아름다울 수도 있고,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본질은 아니라고 본 거죠. 본바탕이 있은 후에 문화와 문명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실질이 없이 꾸밈만 강조하는 것은 크게 길하다거나 크게 이롭다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비괘의 단전에 보면 우리가 인류의 문화, 문물, 질서를 나타내기 위해 흔히 쓰는 단어인 ‘인문(人文)’이 나와요. 그럼 원래 주역에서는 인문을 뭐라고 설명했나요. 문명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것, 혹은 문명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인문이라고 했어요(文明以止 人文也). 모든 존재가 모여서 살기 시작한 후 서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으로 봤던 것이에요. 천문이 하늘의 이치라면, 인문은 인간의 도리예요. 따라서 천문을 살피면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고 더위와 추위가 음양의 이치에 따라 번갈아 나타나는 것에서 사시의 운행이 서서히 변(變)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되고요. 인문을 살핌으로써 모든 미숙한 존재들이 화(:生死)하여서 삶의 시간 동안 완전한 존재로 이뤄져 가는(), 천하를 변화시키고 성취시키는 과정을 볼 수 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요. 인문은 천하를 교화하고(敎化天下), 예속을 성취하며(成其禮俗), 통치자로서의 성인이 비의 도를 활용하는(聖人用賁之道) (일종의 문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보니까 인문, 인문, 자주 쉽게 말하고도 딱히 확실하게 잡히는 건 없었던 애매모호한 단어가, 이젠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럼 비괘의 다음에 나오는 괘는 무엇일까요. 만물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지고, 그 꾸밈이 극에 달한 후에는 반드시 이제는 반대쪽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돼요. 그러니 이후부터는 점점 깎여나가고 줄어들게 되겠죠. 이것이 바로 맨 아래부터 다섯 개까지가 모두 음이고 맨 마지막 위의 하나만 양이 남은 모양의 괘, 박괘(剝卦)가 되겠습니다. 음이 아래서부터 점차 양을 없애고(깎아먹고:) 자라나서 다섯 개를 다 차지했으니 음의 무리가 득세하는 게 훤히 보이는 시절이군요. 마지막에 간신히 남아있는 상구, 양괘 하나에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왔다고 해요. 큰 과일 하나(, 군자)가 아직은 음(소인)에게 먹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죠. 말이 나온 김에 상구 얘기만 잠깐 해보면요. 소인이 아니면 힘들 수밖에 없는 박의 시대에 끝까지 잘 버틴 군자는요. 드디어 백성들이 마련해 주는 수레를 당당히 탈 수 있게 돼요(君子得輿). 소인의 힘은 이제 많이 빠져서요. 큰 해를 더 이상 끼칠 수 없고요. 힘을 써 봤자 임시로 지어놓은 작은 초가집의 지붕만을 벗겨낼 수 있을 뿐(小人剝廬)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전 여기서 아기돼지 삼형제의 집을 입김으로 차례로 날려버리던 늑대가 생각났어요. 첫째의 초가집과 둘째의 나무집을 쉽게 불어 무너뜨릴 수 있었던 늑대가 셋째의 벽돌집은 부술 수 없었다는 얘기 있잖아요? 아무튼, 상구까지 오면 이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음의 기세는 정말 많이 약해져서 첫째 돼지의 초가집도 겨우 지붕만을 흩트리는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끔찍한 공포영화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든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알고서 보면 중간의 과정들이 그렇게 무섭거나 힘들지 않죠. 이 효과를 노리고(!) 이제 군자에게 힘겨운 박괘의 시대를 앞으로 돌아가 살펴보면요. 처음부터 대놓고 말합니다. 박은 나아가는 바가 있는 것이 이롭지 않다(剝 不利有攸往)고요. 박괘의 시대에는 큰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해요. 뭔가를 해보겠다고 한다든가, 국가경영대책을 새삼 내놓는다거나, 사생결단을 내어 흐름을 바꿔보겠다든가, 이런 모든 것을 하지 말라고 주역은 조언합니다. 흐름이라는 게 있다는 거예요. 세상일이란 게 그렇죠. 어느 때는 쉽게 후루룩 되어버리는 일이 어느 때는 죽어도 안 되는 게 있잖아요. 밀물과 썰물을 타는 것처럼, 물이 주기적으로 그 흐름을 바꿀 때, 그에 맞춰 헤엄을 치면 훨씬 수월할 수 있겠죠. 굳이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미친 듯이 헤엄을 치면서 기운을 뺄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속도를 내는 것은 고사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오히려 물길에 휩쓸려 뒤로 가버리거나, 심하면 익사를 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에요. 1/n의 정해진 양을 채우면, 즉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다시 양이 자라는 흐름이 반드시 올 테니까요. 일단은 조바심을 내려놓고 기운의 흐름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 잘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됩니다. 지혜로운 군자는요. 이 흐름을 잘 살펴서 때에 따라 그 기운을 죽이거나 높이면서(隨時消息) 박의 시대를 보내요. 그러면 소인의 해를 면할 수가 있게 된대요. 이때는 면하는 것으로도 괜찮은 거예요. 소인들이 점차 강성해지는 이런 시기에는 사실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도 없고요. 능력이 있는 군자라도 자신의 능력과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숨어 살아야 해요. 아까 제가 공포영화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박괘는 효사들을 보고 있으면 공포영화랑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특히 1, 2, 4효로 점점 변화하는 상황을 보면요. 초육에서 내가 누워있는 침대의 다리에서부터(剝床以足) 스물스물 올라오는 흉한 기운(박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서 침상 다리부터 깎아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더 끔찍하죠)이 육이에서는 매트리스 바로 아래의 침대 상판에까지(剝床以辨) 미쳐오고요. 육사로 오면 피부에까지(내 몸에까지 직접) 뻗어오는(剝床以膚) 거예요!! 꺄악!! 끔찍하지 않나요. 아주 실감나는 비유가 아닌가요!! 아무튼, 박의 시대는 이렇게 점점 바닥에서부터 음의 기운, 소인들의 세력이 점점 자라나 군자들을 압박해가는 무서운 모양새였습니다.

오늘 ‘석과불식’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박괘의 마지막에 와서 양이 아직 음에게 먹히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본문의 맥락을 생각하면 ‘큰 과일은 먹히지 않으니로 번역하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석과는 먹지 않는다’, 즉 하나 남은 양을 먹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 두어서 미래를 준비한다는 맥락으로 많이 쓴다고 하죠. 이 이야기를 듣는데 (큰 맥락과 상관없이, 어쩌면 난데없이..) 까치밥을 남겨두는 조상들의 따뜻한 인정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까치밥 하면 떠오르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대부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 중에서도 이상하게 너무 좋았던 시(전 요거랑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좋았더랬어요.) 하나를 같이 나누고 마지막 인사를 삼을까 해요. 아시는 분들 많으시겠지만요.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입니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전체 2

  • 2016-04-01 13:09
    음...... 소인들이 득세해가는는 공포영화라니.... 인상적입니다ㅋㅋ
    암튼 언니, 우리의 주역 복습은 언니에게 기대고 있답니다. 막 아프고 그럼 안되요- 언니가 겪는 요새의 1/n시간들이 부디 무구无咎하기를! 씨유토요일-

    • 2016-04-28 12:09
      복습내용이 그닥 충실..하진 않은 게 함정.. 책임감(!!)을 가지고 더 노력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