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겨울특강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 : 제 3강 <게르망트 쪽으로>

작성자
김유진
작성일
2017-02-06 19:50
조회
395
제 3 강 상실의 시대, 벨 에포크 : [게르망트 쪽으로] 후기 / 유진

 

프루스트가 살았던,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대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로 당시 시대는 귀족-부르주아-평민의 형식적인 계급이 존재하다 1차 세계대전 후 그 계급이 무너지며 모두가 ‘부르주아’ 중심의 사회 형태를 띠게 됩니다. 프루스트는 노동자나 빈민의 삶이 아닌 오직 부유층의 삶만을 아주 세세하게 씁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사교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프루스트의 작품 배경인 ‘벨 에포크’ 시대는 프랑스 제 3공화정의 시대였습니다. 그 전의 남성 부유층들 중심의 사회였던 프랑스가 모두가 글자를 배울 수 있던 제법 평등해진 사회로 변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벽에 초콜릿을 글로 쓴 광고가 이런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대다수가 예전보다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고, 여흥문화도 많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많은 거장들을 배출하며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 문화예술자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를 가장 많이 담아내고 있던 곳이 바로 모던 파리였는데, 파리는 오스망 남작의 도시 정비 때부터 근대적인 모습을 보이며 오스망은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도시 풍경을 불르바르와 에비뉴로가 활개 치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첨단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도시에 들어온 많은 시민들은 물질적인 부만 있으면 누구나 신분세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벨 에포크 시대의 에펠탑은 물질적 부의 만인평등 (누구나 노력하면 저 문명을 소유할 수 있다) 사상의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서는 그 대표 시민으로는 스완 부인이 있습니다. 스완 부인은 본래 매춘부의 지위였지만 스완과 결혼함으로서 신분상승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는 신경 쓰지 않고 불르바르의 거리를 산책하는 새 마차와 화려한 옷차림의 스완부인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불르바르는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행의 하나였던 거리로 문명인이라면 이곳에서 새로운 문물로 치장된 상점과 사람들, 새로운 상품들을 보러 다니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파리는 도시 하나가 거대한 전시장으로 사람들은 모두 텅 빈 눈빛으로 도시를 배회 했습니다.

 

이 텅 빈 시선 속에서는 지금 이 시대에서는 채울 수 없는 우울이 담겨 있습니다. 파리는 물질세계에서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을 원하며 새로운 것을 얻으면 다시 더 새로운 것을 가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욕망은 물질로는 절대로 채워 질 수 없고, 결국 끔찍한 권태만이 남을 뿐이었습니다.

 

그 예로 바로 스완의 부인을 예로 들자면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팔아야 하는데 스완의 부인, 오데트는 바로 자신의 성을 팔아 물질적 욕구를 채웠습니다. 그로인해 물질적 욕망은 채울 수 있을 지라도 그건 아주 잠시 뿐, 시간이 지날수록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원인모를 공허함과 점점 검어지고 무거워 지는 마음만이 남을 뿐이었습니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신으로 인해 현실의 자신은 사라지고 맙니다. 다른 예로 책 속에 나오는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우울한 파리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 라는 건 결국 프루스트 자신입니다. 결국 프루스트 자신도 스완이나 오데트와 같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프루스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입지를 다지며 여러 살롱을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기며 게르망트 가의 살롱까지 진출 합니다. 하지만 끝내는 자신이 살고 있던 부르주아의 세계를 오랜 세월을 거쳐 화려한 세계 속 이면에 글을 쓰는 길을 걸어갑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화려한 세계 속 우울과 공허함을 발견하는 것,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것, 한 세계에 대한 너무나도 다른 시점의 생각들, 프루스트가 선택한 길은 매우 힘든 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보여준 대표적인 부르주아로는 스완씨와 베르뒤랭 부인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스완 씨는 다양한 예술품부터 새로운 상품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식은 있지만 정신은 텅 비었습니다. 결국 무엇을 수집해도 권태만 늘어날 뿐 자신의 수집욕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완은 새로운 상품, ‘여자’를 예술품처럼 수집하다 매춘부 오데트와 결혼 하게 됩니다.

 

베르뒤랭 부인은 새로운 상품으로 자신의 살롱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해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더 많은 부유층들을 자신의 살롱으로 불러 모으고, 그리하여 그들과 음악회와 전시장을 다니며 자신의 허망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둘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정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스완은 결국 병에 걸려 죽고, 그의 부인인 오데트는 스완 보다 신분이 높은 남자와 결혼하여 백작 부인이 됩니다. 또한 베르뒤랭 부인은 책에서 러시아 발레 무용가들을 돕는 늙은 선녀 카라보스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비유합니다.

 

프루스트는 부르주아들의 반지성주의 다음으로 귀족들의 형식주의를 보여줍니다. 귀족들의 살롱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출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책 속에서는 그 예로 ‘게르망트’ 가의 살롱이 나옵니다. 오직 게르망트 가에게 인정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살롱에 프루스트는 우연히 공작부인의 호기심을 사 들어가기도 합니다.

 

돈과 지위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게르망트’ 가의 공작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항상 우아한 미소를 지니고 있는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전부터 머리에 박혀있는 형식일 뿐 그런 자비로운 행동에 그녀의 자의식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프루스트와 그의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미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이라 여기던 공작부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바로 최신의 사상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하는 스완과 전통에도 사상에도 관심이 없는 초월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 프루스트였습니다. 귀족들은 부르주아의 앞에서 그들과 달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었지만 그 형식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부르주아들에 비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것일 뿐인 귀족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미술관에서 평생 똑같은 관람평만 줄줄이 말하는 셈이었습니다.

 

프루스트는 부르주아와 귀족들의 반지성주의와 형식주의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결코 그들을 포함하고 있는 특정한 계급에 대해 비판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반지성주의 살롱 속에서 나오는 예술계의 거장들이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프루스트에게 계급이나 성, 취향은 매번 이야기를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하나의 분자일 뿐 이었습니다. 생 루의 죽음 앞에서 두 동강이 난 그의 얼굴에 잔혹한 호기심을 보이는 프랑수아즈와 그 비위를 맞추는 집사를 보여주는 면에서 빈민이나 하인 계층과 빈민 계층이라고 해서 늘 선함이나 진실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했던 계급은 무너지고 대 귀족, 부르주아 할 것 없이 심지어 매춘부나 지방 출신의 학사들이 그 높디높은 게르망트 살롱에 섞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이유에는 부르주아적 욕망과 귀족의 사교계를 신품처럼 취급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프루스트는 이러한 변화의 참된 원인은 시간에 있다고 말합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작품을 읽다보면 점점 사람들의 옷차림, 소품들의 디자인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프루스트가 보여 준 시간의 흐름 속에는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허망과 권태, 원인모를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다른 부르주아들과 다른 길을 가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삶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시대의 사람들을 다방면의 시각으로 아주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우울과 허망함을 알아차린 프루스트는 그에 맞서 싸우거나 그 우울에 빠져 허망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닌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글로 쓰는 새로운 길을 택한 것입니다.

 

 

 

 

tps:/pc
전체 3

  • 2017-02-06 23:32
    프루스트는 자신이 살고 겪었던 세계의 모순과 허위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지요. '인간은 신분이나, 성, 계급의 이름으로 수렴될 수 없는 존재이다.',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수한 시간의 결들을 되찾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14년 가까이를 날마다 밤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 작품을 쓰는데 몰두했습니다.
    소설 속 '나'는 프루스트 자신은 아닙니다. 프루스트는 자신이 만나고 겪은 세계의 조각들을 짜맞추어 주인공을 비롯해서 그 모든 인물들을 창조했습니다. 외교관 아버지에 막대한 유산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의 것이었지요. 프루스트는 그런 인물의 부르주아적 출세가 모던 파리의 산책자들(그 자신을 포함해서)이 꿈꾸던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우울한 세계관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도요.
    아, 벌써 금요일이 기다려집니다. 음핫핫핫!!

    • 2017-02-07 11:05
      부족한 부분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 2017-02-09 00:12
    오흥흥. 이번주 금요일은 더 쟈미있을 거예욤. 소돔과 고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