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카프카 강좌 6주차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9-10-29 08:28
조회
186
카프카 세미나-6강 후기/가족과 관료제/2019.10.29./윤순

 

앞의 다섯 번의 카프카 시간들에서 우리(규문 카프카 멤버들)는 선민샘의 추천을 따라서 『카프카의 단편집』(관찰, 시골의사, 중편인 변신 그리고 그가 책으로 출판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에 남아 있던 단편들 등)과 그가 쓴 편지들을 장편 『성』과 『실종자』를 중심으로 횡단하고 연결시키며 카프카의 세계를 이해해 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은 카프카의 장편 『소송』을 중심으로 카프카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예속 장치로 가져온) 가족(아버지)과 관료제(법)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카프카 여섯 번째 시간을 저의 맥락으로 이해한 정리입니다.

  예속의 길과 자유의 길은 동시에 열려 있다. 물론 둘 모두 완전한 안전과 해방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소송』의 주인공인 요세프 카에게 삶은 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존재들(사물, 사람, 제도를 다 포함해서)과 어떤 관계를 맺는냐에 달려 있으며, 이것은 매번 어떤 욕망에 이끌리느냐, 자기 앞에 누가 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수행적이며 생산적인 상황으로 나타난다. 법은 이 상황, 상황 속에서 결정되는 관계들의 문법이다. 따라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행적이다. 카프카는 어떤 표상과 어떤 생각 방식이 그 자신을 예속의 길로 이끄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그의 일기나 편지, 작품 속에서 그 문제는 가족과 관료제의 형상을 통해 설명된다. 전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얼굴을 계속 포개고 있는 초월자 아버지의 표상이다. 후자는 카프카가 자기 시대에 가장 문제적 예속 장치라고 보았던 시스템에 대한 논의이다. (여섯 번째 선민샘 강의안, p1)

카프카는 그의 작품에서 초월적 아버지와 초월적 국가 시스템을 대상으로 정의하거나 저항하거나 배척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시도했을 뿐입니다. 그의 질문들은 “아버지는 누구인가?, 국가란 어떤 기능을 해야하는가?”와 같은 것이 아니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어떠한 명쾌한 인과응보적 결말을 찾아볼 수 없고, 그에 따라 어떠한 교훈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어가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매 순간마다 각각의 조건에 처해서 끊임없이 헤매고 다치고 획득하고 다시 헤매는 정답 없는 과정을 따라가며, 그를 따라가는 독자도 자신들의 조건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헤매는 과정을 함께 할 때만 그의 작품 읽기의 저항감을 줄이고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는 시대의 프라하 그리고 그러한 프라하에 살고 있지만 체코인이 아닌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조건을 통과하고 있는 카프카에게 기존 체제에서 흔히 어떻게 살면 된다는 정답을 떠나서 자신이 던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윤리적 질문은 절실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구성시키는 중요한 조건들(가족, 국가 시스템)과 어떻게 조우하는가는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프카는 알았고, 그는 그것을 정의하기 보다는 그것과 함께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전제로 거기서 달아나고 붙잡히고 다시 달아나며 살아가는 삶을 사유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삶도 한계(조건)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프카는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는 것보다는 자신의 현재의 조건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들을 읽어가며 20세기 초반의 프라하라는 시공간을 카프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치열하게 구성하며 살았다는(극한까지 밀어붙인 실천) 느낌이 든다면, 그의 작품에 훨씬 실감나게 자신의 삶을 겹치는 과정을 경험할 것 같습니다. 작품의 주인공과 같이 끊임없이 문을 발견하는 과정을 말입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던 한계는 바로 가족(아버지)과 국가 시스템(법, 제도)이고, 그가 그 한계들과 어떻게 조우하는가를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아버지

가족(아버지)이 등장하는 초기 작품들인 아들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선고』, 『화부』, 『변신』이 있고, 중후반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권위자가 등장하고 연예, 관료제, 공동체등과 같은 테마들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아버지를 권위적이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두고 프란츠 카프카가 권위를 이용해 나머지 가족들을 괴롭힌 자신의 아버지인 헤르만 카프카에 저항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이나 편지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대하는 그의 태도나 아버지에 저항하기 위해 떠나지 않았던 카프카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권위를 초월적이어서 위협적으로 느꼈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처한 조건이 구성한 아버지, 조건들에 예속되어 발생한 아버지의 권위에서 카프카는 아버지의 모순을 보았지만, 그 시대에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야 하는 가장인 아버지는 다르게 살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것 또한 이해했습니다. 카프카 아버지의 조건부터 보자면,

  ‘체코 유대인 독일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한 상황 속에 아버지가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베를린의 독일인들에게는 집 안의 아버지와 회사의 상사, 국가의 수반이 똑같이 권위의 상징으로 포개질 수 있었다. 아버지라는 기호는 각기 다른 조직의 구심점으로 표상되면서 한 집안의 가장을 계속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기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라하 유대인의 경우는 다르다. 가장은 프라하에 있는 여러 체코의 사회 조직을 지위하는 ‘아버지’에 자신을 포갤 수 없었다.(여섯 번째 선민샘 강의안, p1)

카프카는 그 시대의 그 곳에서 구성된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 아버지의 모순된 행동을 틀렸다고도 하지 않고, 더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모순적인 캐릭터를 수정 보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버지가 단지 이러저러한 조건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할들이 얼마나 자주 충돌하는지를 포착하려고만 한다.”(여섯 번째 선민샘 강의안, p4) 하지만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아들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카프카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지만 복종하지 않는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에 저항했는가? 아닙니다. 카프카는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는 이분법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져가지 않습니다. 단지 어린 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권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바로 이때 카프카는 아들에게로 분석을 옮깁니다. 이런 변덕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존재(아버지)를 누가 권위를 가진 자로 옹립하는가? 바로 그의 자식들입니다. 복종에서 비롯된 권위입니다. “권위란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알기에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바치는 영예입니다.”(선민샘 강의안) 아버지의 권위는 이렇게 출현하는 것이지, 정의롭고 절대적인 가치를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카프카가 아버지의 권위에서 확장해서 그 다음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법질서입니다. 카프카에게 법은 어떻게 출현하고 있는지 그의 장편 『소송』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료제(법)

『소송』은 주인공 요세프 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자기 방에서 체포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옆방에서 심리를 받지만, 바로 회사에 출근하는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갑니다. 현재의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상황은 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상상(환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으로 법의 제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카에게 재판으로 명확하게 끝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카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고,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법원을 찾아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지만 끝까지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명확한 판결을 받아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누구도 왜 인지 알 수 없는 죽음에 이릅니다. 카프카에게 법체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소송』에서 카프카는 관료제적 시스템이 가장 복합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법원이라는 법제도를 선정해서 이 빠져나갈 길 없어 보이는 그물 안에서 어떻게 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도들은 전체주의 사회 시스템 안에 살아가고 있는 한 부분으로서의 자유가 됩니다. 법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것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꼭 지켜져야 하는 주어진 법이라 전제한다면, 인간 모두가 복종을 했을 것이고 법에 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법의 그물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소송』에서 법은 요세프 카의 가장 내밀한 방, 회사업무, 연애사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법이 그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침투하고 있지만, 요세프 카는 복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카 자신이 무죄를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 주인공도 법에서 빠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프카는 법이 내밀한 부분까지 영향을 주지 않을 때(법이 없어졌으면, 내가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면 등)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요세프 카는 법이라는 조건에서 도망갈 수 없는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법은 마치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에서 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서있는 장소(조건)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찾는 시도만을 끊임없이 합니다. 마지막 문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인공 카가 죽으며 끝나는 소송의 끝을 두고 여러 설이 많다고 합니다. 카프카에게 죽음은 그냥 하나의 문일 뿐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죽어서도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보지 않고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시도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체 1

  • 2019-10-29 14:12
    카프카의 독자는 누구인가? 갇혔다고 생각하는 자. 출구를 찾으려는 자. 그러면서도 '지금 여기'를 긍정하는 자.
    윤순 샘과 공부하면 늘 더 깊이, 더 넓게 들어가게 됩니다. 이번 카프카와의 만남에서는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음주가 마지막. <유형지에서>의 독해를 시작으로 한번 풀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단식 광대>의 주인공처럼 굶기로서의 읽기에도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