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6.26 예술강좌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7-02 20:26
조회
176
200626 예술강의 후기

이번 강의 주제는 ‘마음의 세계와 예술의 탄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술이란 어디서 기원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맥락 없이 제기되면 일종의 농담처럼 들립니다. 듣자마자 한편에는 회화, 음악 같은 ‘작품들’이 떠오르고 다른 한편에는 도무지 일상에서는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예술적’ 디자인이나 행위들이 떠오르거든요. 그런데 이런 ‘예술이 뭐냐!’ 라는 질문이 가끔 일상에서도 첨예한 논쟁 지점으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주로 돈과 얽힌 문제일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강의 서두에서 ‘조영남 대작 사건’을 언급하셨는데요, 요약하자면 ‘조수를 써서 그린 그림을 자기 작품이라고 말하며 팔았다면 이것은 사기인가 아닌가’를 사법부가 판단해야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상고까지 간 이 사건은 무죄판결을 받았는데요, 기사를 찾아보니 무죄 판결의 근거로 ‘사법 자제’를 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술은 사법부보다 전문가가 더 잘 알 것이라며 손을 떼는 느낌인데요, 그럼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알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미술관에 변기를 전시한다든가, 이미 배포된 유명한 이미지를 대량생산하는 그런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이번 대작 사건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우리의 공통적인 생각은, 그것이 수프 통조림이든 빗자루든 아니면 정교한 터치를 자랑하는 유화든, 그것이 반드시 어딘가에 전시된다는 것입니다. 작품은 전시(display)됨으로써 진정 작품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전시란 어떤 사물의 맥락을 제거해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물(Thing)’은 어원을 찾아보면 ‘의회’를 뜻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고 분열되는 정치적 장을 떠나 사물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죠. 우리가 ‘사물(事物)’이라고 말할 때, 그 물(物)이 일(事)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시는 이 사물을 분리하는 작업입니다. ‘dis'는 ’분리하다‘, ’ply'는 ‘엮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디스플레이란 그런 엮인 것들을 분리시켜 맥락에 상관없이 두고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물의 탈맥락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물을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유화의 발명과 막대한 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화가들을 후원하며 작품을 의뢰하고, 그림들을 궁전에 쌓아놓는 콜렉터들의 시대가 르네상스 시기였지요. 성당의 스테인글라스나 제단화, 벽화들은 그 공간과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요. 스테인글라스는 그 성당에, 해가 드는 특정 시간에만 볼 수 있고 벽화들은 모두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진 예배의 대상이었고요. 그런데 유화의 발명과 함께 아름다움은 이제 옮길 수 있고 전시될 수 있으며 소유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탈맥락화의 전당이 바로 미술관/박물관이고요.
채운샘은 미술관과 백화점의 공통점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모두 창문이 없고 시계가 없으며 흰 벽이라는 것입니다. 찾기 힘든 곳에 있는 미술관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계단과 오브제로 장식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나와 바깥세상은 완전히 차단됩니다. 그 안에 전시된 것들은 뭐가 됐든 '어딘가 예술적인' 느낌이 들게 만들고요. 이 모든 장치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시된 것이 어딘가 특별한 것으로 느끼게 해 사고 싶도록 욕망을 부채질하지요. 따라서 지금 예술 작품을 '작품'이게 하는 것은 이 미술관이라는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무맥락적으로 가져와서 아름답고 특별하며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 현대미술의 기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크게 두 가지 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이 일종의 초월성을 경험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예술의 종교성’입니다. 무엇이든 병렬적으로 처리하던 뇌가 유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비유나 상징을 할 수 있게 되고, 이질적인 것을 중첩시키는 것이 가능한 마음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현생인류를 있게 했다는 것이죠. 동물과 달리 인간은 관념을 통해서 도달하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이 망상기제와 함께 예술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바타유는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동굴이라는 맥락을 문제 삼습니다. 가장 은밀하고 어둑한 곳에 그려진 이 동굴벽화에는 생생하게 묘사된 동물과 흥분상태 속에서 죽은 샤먼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죽음과 성(性)은 언제나 인간에게 금기로 작동했는데, 이 금기를 넘어가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술의 비인간적 기원입니다. 들뢰즈는 스케노포이에테스라는 새에 주목합니다. 새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 노래가 부르는 반경을 자기 영역으로 삼는데, 이 스케노포이에테스라는 새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떨어진 잎사귀를 뒤집어 놓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포스터’를 걸어 두는 것이죠. 이 신기한 행위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기원을 찾습니다. 즉 예술이란 동물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리듬을 조직하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실체화하는 예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강에서 나왔듯 근대의 인간들은 시각적인 감각을 통해 세계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한편으로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종의 정체성의 소유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환경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 환경과 관계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이때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과 마음도 탈맥락화 되는 것이죠. 그리고 소유물의 대명사인 돈을 작품과 자기 몸에 걸고 말이죠. 그럴수록 예술은 ‘돈이 되는’ 특별한 소유물이 될 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소유할 수 있는 것'의 목록과 규모만 커지고 있고요(신전의 계단이나 벽화도 뜯어다 미술관에 전시되는 지금!). 강의 제목처럼 예술에 대해 '묻고' 가야 할 시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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