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7. 3. 예술강좌 후기

작성자
조한결
작성일
2020-07-10 17:14
조회
195
이번 강의의 주제는 '감각'이었습니다. 흔히들 예술은 감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또 예술을 감각과 관련된 무엇이라고 말하려면 우선 감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할텐데, 그럼 감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감각한다고 하는 것은 외부 경험이 몸을 통해 지각된 후, 그 지각이 무의식의 어떤 기억과 만나 언어화되는 과정이라고합니다. 즉, 감각은 몸과 정신 모두의 동시적인 문제인 것이지 몸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지요. 근대에는 이런 인간의 감각을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은 보는 기관이고, 귀는 듣는 기관, 코는 냄새 맡는 기관이라는 식으로 신체의 각 기관을 나누고 제한적인 기능과 대응시켰습니다. 이처럼 유기체(n)를 각 부분(1/n)의 합으로보는 방식을 유기체론이라고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유기체론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과연 눈은 시각에만 영향을 미칠까요? 혹은 보는 것은 눈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단적인 예로, 같은 음악이라도 낮에 들을 때와 밤에 들을 때는 분명 차이가 납니다. 또 맹인은 보지 못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맹인은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귀로, 몸의 감각으로, 코로, 맛으로 자신만의 '봄'을 구성하여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했지만 늘 길을 잘 다니던 맹인이 갑작이 눈을 뜨게 되자, 어디로 가야할지 어찌해야할지 몰라할 때, 다시 눈을 감고 가라는 서화담의 일화에서 처럼 말이죠.

감각과 예술에 있어 또 생각해볼 지점은 바로 '감각의 사회적 규정'입니다. 무엇을 느낀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 감각이 어떤 시공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감각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악취'입니다. 배설물의 냄새는 중세에도 있었고 근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냄새에 '악취'라는 꼬리표를 달고 불쾌하고 제거해야되는 것으로 감각한 것은 근대에 계몽운동 시대부터였습니다. 근대에 생겨난 인식들이 위생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고 배설물의 냄새를 '제거해야하는 악취'로 감각하게 한 것이지요. 중세의 사람들 역시 배설물의 고약한 냄새를 맡았지만 그 냄새를 제거해야하는 악취로 감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배설물과 썩어가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 또 그런 부폐가 생명의 기반이 되어준다는 인식을 놓치지 않고, 이들을 문학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어서 채운샘은 위와 같이 근대적인 기준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각에 반항하는을 던지는 작품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렘브란트의 말년 판화작품과 이불 작가의 MoMA 전시작이 그것입니다.
렘브란트는 부랑자가 성기를 내놓고 소변 누는 모습이나 여인이 소변 누는 모습을 판화로 담았습니다.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에서, 빅토리아 시대 때부터 배설은 누구나 하는 것인데 철저히 금기시 되었고, 그래서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왜곡,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판화는 이런 사회적 금기를 깨는 것이었고 때문에 말년의 그의 작품은 부르주아들로부터 외면당해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불 작가는 실제 생선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자 생선 썩은내가 온 미술관에 진동했다고 합니다. 이는 '냄새, 특히 악취는 왜 작품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동시에 그저 시각적으로만 보면 예쁜 구슬과 생선들이 생선 썩은 내라는 후각과 결합하여, 소외된 여성의 노동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감각에 대해 생각해 볼 다음 지점은, 감각과 그것의 시공간적 맥락입니다. 보통 감각을 시공간과 분리지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공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감각이 과연 가능할까요? 이는 지난 시간에 강의한 Thing의 개념과도 유사합니다.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때, 시공관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감각도 그것을 느끼는 시공이 존재하고, 그 시공의 맥락에 따라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는 마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감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유합니다. 그렇게 되면 장소성이 상실되고 맙니다. '장소'란 어떤 공간이 신체를 통해 어떤 식으로 경험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것을 경험하는 신체와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중세 마을의 교회 종소리입니다. 중세에서 마을의 범위는, 그 마을의 교회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범위까지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공통된 사회적 리듬을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어떤 공간은 그 공간을 감각을 통해 경험하여 장소로서 우리에게 인식되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감각에서 벗어난 감각은 어떤 것이 있으며, 이들이 제시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채운샘은 우선 '본다는 것'에 대한 탈근대적인 관점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근대가 시각을 이해하는 방식은, 카메라의 원리입니다. 외부에 대상이 있고 그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눈 안에 상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눈에서 광선이 나와 대상을 비춰본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들에게 '봄'은 '비전(vision)'이었습니다. 즉, 내부의 빛이 외부로 나와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출현시킨다는 의미의 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봄은 내부에 어떤 빛이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시각이 단순히 외부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동방교회의 icon입니다. 동방교회의 성화인 icon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 문화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봄으로써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가정집에서도 그 그림이 있는 장소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보는 행위를 통해 장소와 신체가 맺는 방식이 변화 및 결정되며, 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시는 티벳의 탱화입니다. 벽에 걸리는 거대한 부처님 그림은 그 공간이 장소가 되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날 때 그 그림을 봄으로써 자신의 태도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시각이 윤리성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본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탈맥락적인 '봄'으로 존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좋은 대상을 볼때 사용하는 '보다'와, 부정적인 대상을 볼 때 사용하는 '보다'의 단어가 달랐다고 합니다. 즉, 감각은 대상과 맥락 속에서 존재하고 영향 받는 것입니다.

탈맥락적이고 부유하는 근대적 시선으로부터 다른 길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채운샘은 불교에서 감각을 어떻게 대하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감각은 오온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무엇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감각을 실체화하고 감각한 자신도 실체화해버립니다. 가령, 달달한 케익을 먹으면, 그 음식은 '단것'으로 존재하고, 나는 단맛을 느꼈다, 즉 단맛을 느낀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각은 오온의 일시적, 순간적 작용일 뿐,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감각과 감각한 내가 실체화되어 기억에 고정됩니다. 때문에 단맛을 느끼는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느껴진 감각을 존재한다고, 또 어떻게 존재한다고 표상화해 기억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 수행이고요.
그래서 들뢰즈는 감각은 쾌/불쾌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이란 발산적 차원의 것이며, 힘의 느낌이 변화하는 것이라고하였습니다. 때문에 예술이 갖는 의미는 관성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데 있으며, 익숙한 것에 균열을 내는 괴물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존 케이지는 일상의 소음을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소리를 미세하게 감각하는 훈련을 하게되면 더이상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라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그저 모든 소리가 있음을 감각하게 됩니다. 요컨데 어떤 감각을 특권화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모든 감각에서 편안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무미'에 대해 논합니다. 아무맛 없음이 최고이 맛이라는 동양의 사유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이라 말합니다. 즉,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담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번 강의는 감각에 대한 우리의 전제들, 근대의 전제들을 돌아보고 여기서 벗어나 다른 의미와 방식으로서 감각하는 법에 대해 생각해볼수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2

  • 2020-07-12 12:58
    꼼꼼하고 친절한 후기 감사합니다!
    저는 카메라 렌즈와도 같은 우리의 시각에 사물을 객관적이고 탈맥락적으로 보는 근대의 전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무척 새로웠습니다. 눈에서 광선이 나와 세상을 그러한 방식으로 출현시킨다는 그고대 그리스 인들의 시각vision은 정말 멋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내부의 빛이 외부를 비춘다는 것, 보는 것 자체의 윤리성.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본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정보수용으로 치부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지금 우리의 시대는 악취라는 감각에 이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접촉에 대한 극도의 신경증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피부 접촉이 아니라 대면 자체에 대한 공포와 꺼림. 우리의 감각이 언제나 시공의 맥락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 2020-07-13 10:19
    자세한 후기 감사합니다^-^ 저는 신체가 장소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었고, 그 예시가 중세의 종소리라는 예가 계속 기억에 남네요. 인위적으로 정한 경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 만큼을 자기 영역으로 삼는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