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7.17 예술 강좌 후기

작성자
지산
작성일
2020-07-23 14:43
조회
196
예술에 대해 우리가 놓아버리지 못하고 있는 낡고 질긴 관념들을 (파)묻고, 아직 오지 않은 예술에 대해 (캐)묻겠다는 채운 샘의 기획에 확 이끌려 여태 결석 한번 안 하고(!) 매 시간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공하고 있는 학인입니다(^^). 수업을 들으며, 그간 내가 아름답다고 예술적이라고 여겨온 것들의 정체며, 나의 것이라 믿어 왔던 스타일이나 취향 같은 것들의 기원이나 경로 같은 것들에 대해 묻고, 또 그것들이 얼마나 막연한 동경이나 낭만주의적 이미지에 기반한 것이었나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방학 기간에 구미의 미술관 투어를 다녀와 힘들여 보고 본 명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지인을 속으로 비웃으면서도(그래봐야 당신 삶이 바뀐 게 하나 없잖아?), 그러는 나 자신은 ‘예술적인 것’에 대해 얼마나 거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있었던 걸까요? 십수년 동안 연극을 한답시고 그렇게 티를 내고 부산스럽게 지내야 했던 것도 어쩌면 예술가의 영토에 한쪽 발이라도 담궈 보고 싶었던 허영심의 발로가 아니었을지... 또, 누군가의 행동 방식이나 말하는 모습, 심지어 성격이나 마음씀씀이를 품평하는 나의 태도의 바탕에도 오래되어 시큼해진 미학적 관점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강한 구속력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나아가 삶 전체를 지배해 온 게 예술이라는 그 잘난 이름이 아니었나 싶네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묻고’가야지 하는 심정으로 수업을 듣는 중입니다. 앞으로 세 번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요(!).

먼저, 지난 시간에 보지 못한 작품들,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상, 멕시고 다산의 여신, 프리다칼로의 ‘아이를 유산하는 여인’, 루시앙 프로이트의 ‘개와 함께 누워있는 여인’과 ‘소파 위의 여인’ 등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미의 기준들에 대해 되돌아보고, 미술이라는 게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전체 감각들 모두와 연동되는 것으로. 신체성의 전 층위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파와 구분이 안 되는, 소파 위 거구의 여인의 무거움을, 우리는 단순히 몸무게의 차원에서 시각적으로만 바라보고 경험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번 시간의 주제는, 모방과 미메시스, 그리고 재현이었습니다. 샤크 갤러리에 전시된, 유명 걸작들의 정교한 모작들은 정말로 영원히 진품에 대해 짝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모방하고 모사하는 마음은 어떤 예술적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통해 어떤 작품을 똑같이 베껴쓴다고 해서, 원본과 복사물이 똑같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원본과 복사본이 다른 맥락 속에 존재하기에, 시간과 관계성이 다른 식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별개의 작품이 된다는 겁니다. 하여, 똑같지 않은 둘 사이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고요. 이런 보르헤스의 생각에 동의하건 안 하건 간에, 우리는 모방한다는 것에 대해, 그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 모방, 즉 미메시스는 고래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해 온 유명한 테마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모방의 산물은 이데아와의 거리와 비례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걸로 인해 쾌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모방의 능력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지요. 그리고 개체를 전체와의 유사성 속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미메시스이고 언어를 이같은 미메시스적 능력의 흔적으로 보았던 벤야민과 현대의 대중문화 비판이라는 맥락 속에서 자연미의 모방과 그 회복에 대해 말하는 아도르노, 그리고 원숭이 피터의 인간 관찰과 모방을 통해 배움과 변용의 실천으로서의 미메시스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거느리고 있는 게 미메시스 개념입니다. 채운 샘께선 어떤 것이 정답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모방에의 의지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 그것에 개입된 힘 의지와 욕망의 문제가 중요한 거라고 정리삼아 말씀해 주셨습지요.

참, 이와 관련해 놓치고 가선 안 될 것이 동양의 예술엔 모방 개념이, 세계를 모방한다는 생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이쪽에선 서양과 달리 주체와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바라보는 발상이 애초에 자리잡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공자나 노장을 떠올려 보더라도 주체와 세계의 분리나 대립이 아닌 상호 관계성의 사유를 보여주는 게 분명한 사실이지요. 이쪽에 모방과 비슷한 게 있다면, 기껏해야 그림그리는 훈련 방식으로서의 ‘임모(臨摸)’ 정도가 있다고요.

‘Representation’은, 맥락에 따라 달리 번역되는데, 주로 언어나 사고 영역과 관련해서는 ‘표상’으로, 예술과 관련해서는 ‘재현’으로 번역되는 게 일반적이라고. 재현은, 현실이라는 외부 세계와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즉 대상과 주체의 분리를 전제하는 개념으로, 그런 사고가 없는 동양 쪽에선 성립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이같은 재현 개념에 대해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는 철학자로 들뢰즈와 푸코가 대표적인데, 채운 샘께선 주로 푸코의 논의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셔서 우리는 푸코가 논의한 바 있는 세 화가, 벨라스케스, 마네, 마르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재현 개념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 그림은, 시각적 재현을 성립시키는 모든 조건들(재연 대상, 재현자, 재현에 필요한 공간과 빛 등)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재현을 성립하게 하는 주체의 자리, 즉 화가의 지고한 위치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17세기 고전주의 시기 에피스테메(세계를 주체의 매개없이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주는 것으로서의 인식)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이 점, 화가의 모습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타의 그림(고야나 꾸르베의 그림)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어느 정도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근대적 주체 및 재현 개념과의 전쟁을 선포한 푸코에게, 이 그림만큼 주체가 특권화되어 나타나기 이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또 없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일자적 주체가 중심에 놓이지 않은 회화를 우리로선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흔들어 놓는 작품으로 푸코는 또 마네의 그림들에 주목합니다. 얼핏 보면 빠의 여급과 그 뒤로 펼쳐진 손님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인데 자세히 뜯어보면 이상한 게 너무도 많은 그림. 뒷배경이 빠의 넓은 공간인가 싶었더니 거울상이고, 분명히 거울 상에는 있는데 실제에는 그 나타나 있지 않은, 혼란스러움만 한 가득인 이 그림에서, 푸코는 서양의 오래된 재현의 논리를 해체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를 읽어냅니다. 회화에서의 재현이라는 게, 3차원의 현실을 원근법을 통해 실제처럼 2차원의 평면에 옮겨놓음으로써 그 2차원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일일진대, 아무리 정교한 재현이 이루어진다해도 그 과정에서 왜곡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우리가 아는 재현의 방식대로 실제 세계와 그림의 세계가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마네의 작업은 바로 이같은 서양의 오랜 재현의 논리와 관습을 깨트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시도의 일환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푸코는 재현 개념이 무엇보다도 재현의 대상인 그 ‘무엇’, 즉 ‘본래의 어떤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원본과 기원의 사유에 고착되는 문제를 낳게 된다고 보는데, 그가 긴 기간 마네에게서 확인했던 게 바로 이 점, 대상에 대해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는 반재현적 면모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푸코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논한 마그리트의 그림들. 전에 봤을 때는 뭔가 독특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담긴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나 회화에서의 원본성과 재현의 관념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사유가 담긴 문제작들이라 합니다. 언어의 차원에서든, 이미지의 차원에서든 각자의 방식으로 원본을 재현한다고 하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을 비판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두 개의 이미지가 묘하게 조합된 그림에서, 과연 어느 것이 진본이라고 판정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의 문제 의식이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뿐 아니라 여러 그림들에서, 마그리트는 원본과 모방의 위계적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미지들의 대비를 통해, 어떤 기원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닮은 것으로서의 ‘상사’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마그리트는,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풀려나는 이 세계에서 그 본래 그 자체로 영원하거나, 비슷해 보여도 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변치 않는 동일자적 주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채운 샘께서 말씀하셨지요. 재현이란 인간적 환상이자 허구의 관념일 뿐!!!

그렇담 우리는 회화와 예술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채운 샘의 정리 말씀대로, 단순히 시각적, 정서적 재현의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 작품과의 만남을 이제까지의 정서와 감각의 체계를 뒤흔드는 폭력적 경험의 계기로 삼는 한편, 예술 경험을 사유역량과 신체역량의 동시적 확장의 문제와 연관지어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술은 굳이 무시할 필요도, 특권화할 필요도 없고, 다만 그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유용하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라는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예술과 시뮬라르크의 관계에 대해 공부할 계획라고 합니다. 역시나 기대되는 바가 큰 주제라는 생각입니다.  간만에 이런 글 쓰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만, 정리하면서 나름 재현적 사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반가운 얼굴로,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 2

  • 2020-07-23 19:06
    한풀이 하듯 한가득 씌인 지산 샘 글을 보니 참 반갑네요. 공부 재시동을 위한 마중물을 부으셨다는 느낌입니다.
    연극을 하시는 선생님의 생각이 늘 궁금했는데, 반성적으로 쓰셨지만 '예술적인 것'의 갈망이 있으셨네요. 공부거리가 생기셨어요 ㅎㅎ
    저도 수업에서 주체 탄생 이전의 그림을 해석하는 푸코도 흥미로웠고, 이와 대비해, 주체와 세계의 분리나 대립이 아닌 '상호 관계성'을 표현하는 동양의 그림들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어디든 '주체' 라는 함정이 ... 예술울 발판삼아 다시 공부의 세계로 오신 걸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 2020-07-24 10:54
    선생님 드디어 써 주셨군요 ㅋㅋㅋ 예술을 느낌이나 직관으로 환원하는 순간 그것을 특권화 하기도 쉬운 것 같습니다. 저도 마그리트 그림을 보며 독특한 아이디어를 담았다고 생각해왔던 시간들을 반성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