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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1-06 21:25
조회
159
180113 동사서독 공지

1. 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에 따르면, 각 시대마다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멘탈리티는 각각 달랐다고 합니다. 공동체가 중요했던 고대의 경우 누군가가 죽는 것이 공동체에서는 큰 상실이어서 어떻게든 그 상실의 틈을 메우기 위해 장례식을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이때 죽음은 공동체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다가 서양에 기독교가 전래되자 사후 세계가 중요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다음 세계로 진입하기 전에 얼마나 죄를 많이 덜어내느냐 하는 참회의 문제가 되지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나의 죽음이 아닌 타자의 죽음이 문제가 됩니다. 내 감정을 동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겨진 자의 슬픔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세기부터 죽음은 갑자기 삶 속에서 모습을 감춥니다. 죽음은 문득 병원에서 맞는 것이 되고, 그 제도권 안에서 처리되는 것이 되지요. 이렇듯 죽음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여집니다.
이번 [열어구] 편에서는 장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장자가 하는 말은 관곽(棺槨)도 삼지 말고 그냥 새가 뜯어먹게 버려두라고 합니다. 이 세상 전체가 자신의 관곽이고 부장품인데 무엇을 더하겠느냐는 장자가 하는 말은 퍽 멋있습니다. 그리고 내 죽음이라면 장자처럼 멋있게 말하고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장례지내더라도 상관없겠다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장례를 지내는 제자들 같은 경우는 다를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스승이나 부모의 죽음이라면? 이때 장례문제는 산 사람의 문제가 됩니다. 어쨌든 사회 통념은 장자가 말한 대로 장례 지냈다가는 불효자라든가, 은혜도 모르는 것이라든가 등등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살아가면서 그런 것을 감내하기란 어렵습니다. 산 자는 산 자들 간의 규범에 매여 있으니까요.
이런 산 자들의 관계망을 놓치지 않는 것은 유가입니다. 인간의 인지상정을 간과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고민한 학파가 바로 유가죠. 친한 사람일수록 그 죽음이 슬픈 이유는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라짐은 곧 나의 일부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죠. 유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살아있는 자는 이 상실을 어떻게 처리할지 문제 삼지요. 그때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 예입니다. 장례식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계속해서 망자들과 나 사이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러면서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지요. 그렇다면 산 자가 할 일은 그것을 공동체 의식에 맞게, 정확하게 행하면 됩니다. 결국 유가의 예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이 지녀야 할 생활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이런 예의범절이 쓸데없는 감정의 잉여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관곽 따위 산 자들의 자기만족이고 풍장이 최고다? 이때 장자가 죽음을 거론하는 차원을 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자는 장례 절차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가는 인간의 질서 안에서의 죽음을 문제 삼는다면, 장자는 자연의 차원에서 순환하는 자신의 생사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유가와 장자의 장례에 대한 논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논쟁거리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가와 장자 모두 죽음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듯 20세기 이후 죽음은 병원이 처리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삶에서 죽음의 자리는 지워지고, 말하는 것이 터부시되고, 막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고통과 상실, 그로 인한 공포 정도로 연상하지요. 기껏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는 듯 죽는다’정도이고요. 고귀한 죽음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대의를 위해’, ‘~를 위해’죽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양보할 수 없는 생명의 소진이기에, 그것을 나 아닌 다른 것을 위해 감행한다면 그야말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대의를 위하는 것을 장자는 결국 공명심이 기반되어 있음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때 공명심이 문제 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인가에 기대게 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대의, 국가, 조직, 등등 인간은 자기가 동일시 할 수 있는 자기보다 더 큰 것에 복종하기를 편안히 여깁니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그런데 정작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정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차원의 일입니다. 갑자기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죽을 수도 있지요. 각각의 다른 형태의 죽음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떠하면 좋겠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좋은 죽음’같은 것은 사실 없는 거지요. 어떤 형태를 생각해도 죽음은 내 예상과 다를 겁니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중키고요. 우리가 죽음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예상’이 아닙니다. 정말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죽음=공포라는 구태의연한 상식을 깨는 통찰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일리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의를 위해’, ‘기억되기 위해’죽었다고 보는 것은 ‘십자가 예수’를 무거운 짐처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가 죽음 앞에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떠안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것이죠. 나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떠맡기는 방식이 아닌 방식의 죽음. 이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준 죽음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죽더라도 고귀한 죽음일 수 있는 것이죠.

2. 시비(是非) 앞의 인간
장자 철학은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토론 중 나온 적이 있습니다. 장자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게 없고, 그저 남의 주장을 헐뜯고 트집 잡는 그런 태도만 고수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확실히 옳고 그름을 확실히 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주장이 있어야, 우리는 그 확실한 것에 의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장자>라는 책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열어구] 편 처음만 봐도 그렇습니다. 열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인위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스승인 백혼무인은 잘했다며 ‘이제 사람들이 너를 따를 것이다’라고 격려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열자에게 사람들이 모여 일가를 이루자 백혼무인은 이제 사람들을 떼어 내지 않았다고 나무랍니다. 우리가 보기에 백혼무인은 <장자>를 읽을 때의 난감함을 형상화 해놓은 인물 같습니다. 이게 옳다고 말해 그 길로 따라가 보면 왜 따라 오냐고 화내는 것 같은 그런 <장자>의 어조들.
유가는 어떤 상황에서든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때 ‘합당함’이라는 옳고 그른 기준이 분명히 있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 말에는 자신에게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일도 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장자는 행위의 준칙이 없고, 있다면 자연 뿐입니다. 자연의 특징은? 옳고 그름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 자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선택뿐입니다.
장자는 도를 알기란 쉽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을 주장하지 않기란 어렵다고 하지요. 열자는 자신이 인위를 일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제나라로 가는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것은 곧 세속의 가치를 따르는 것을 멈추는 것과 같지요. 그런데 문제는 세속과 떨어져 어떤 독자적인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조차 장자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튀는’행동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갖게 되면,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갓 작은 지식에 불과한 것도 누군가가 부정하면 바로 자신이 부정당했다고 느끼게 되고, 그런 것을 참을 수 없기에 어느 한쪽이 없어질 때까지 논쟁을 시작합니다. 장자가 보기에 이런 사소한, 하지만 자기를 부정당했다고 느끼는 그 문제가 전국시대와 같은 전란을 가져왔다고 봤던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여러 세력들의 전면전이 일어나던 시대, 그때 장자는 세속에서든, 그것의 반대에서든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파국을 가져오는지 경험했던 것이죠.
장자의 공격지점은 명확합니다. 어떤 주장이 도그마화 되는 지점이죠. 그렇기에 장자의 철학 자체는 영토화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도주선을 그리는 철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자의 철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올바름에 갇히지 않는 탈주선 철학, 이것은 더 쉽게 주장을 펼치며 자기 자신을 고집할 수 있게 된 지금 시대에도 유효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은 채운쌤 외유^^ 관계로 강의가 없고 토론만 있습니다.
과제는 <장자>를 내편부터 잡편까지 모두 각 챕터마다 내용을 정리하고, 그러면서 어떤 주제로 에세이를 쓸지 정리해 오는 것입니다.
후기는 정옥쌤
간식은 각자 조금씩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8-01-08 14:00
    죽으면 관에 들어가 장례식장에 놓이고, 그 다음 화장이 되고. 죽음이 관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옮겨지는 짐이 된 느낌이네요. 뭔가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옮겨지는 거랑 비슷하게 느껴지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