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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열어구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8-01-12 15:21
조회
160
1.6열어구 후기

매번 늦어 죄송합니다

죽음 자체는 실체가 없다

<지락>편에서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조문을 온 혜시가 그 이유를 묻자 장자는 죽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본래 삶이란 것이 없었고, 형체도 없었다. 천지가 황홀한 가운데에 섞여 있다가 변화가 나타나고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태를 이루었다.... 삶을 이루었다가 변화하여 죽음으로 갔으니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지락128쪽 참조) 장자는 죽음을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설명합니다.

<열어구>의 마지막 장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장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을 자연의 순환으로 생각하는 장자는 하늘땅을 관곽삼아 기꺼이 까마귀나 솔개의 먹이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 장자를 厚葬하고 싶어 합니다. 읽으면서는 장자의 죽음관도 이해가 되지만 제자들의 마음 또한 이해가 되었었는대요, 이에 대해 샘은 유가의 생사관과 비교하며 설명해주셨어요. 장자가 자연주의적 생사관을 가졌다면 유가는 인간중심적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에 특히 친한 사람에겐 더욱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죽음을 자기 존재의 상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의 슬픔보다는 자기 상실의 슬픔인 것이지요. 자기 설움에 운다는 그 감정. 인간을 독려해 원만한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중요한 유가는 그래서 祭儀를 신중하게 치릅니다. 엄숙한 제의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상실감을 메우고 공동체를 봉합하는 과정으로 삼는 것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도 장례를 잘 치름으로써 타자에게 최소한 불효자로 기억되고 싶진 않은 마음이 작동한 것이기도 하지요. 이건 살아 있는 자의 규범으로 “대의”라는 명목으로 택한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는 風葬이든 埋葬이든 어떻게 죽을 수 있지만 나의 부모, 나의 가까운 누구의 죽음엔 감히 그 결정이 어려운 것이지요. 강의를 들으며 제가 죽음에 대해 걸려있던 지점이 여기였던 것 같았어요. 다양한 죽음들을 봐온터라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표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孝라는 표상을 넘어서지는 못했으며, 어려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자의 제자들 역시 인지상정으로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던 것이고요. 아내의 죽음에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표상이 없었기에 의식자체가 불필요하기 때문 이어서겠지요.

그런 면에서 죽음에는 사회 문화적 개념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필립 아리에스가 고찰한 죽음의 역사가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의식이 중요하여 죽음은 공동체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는 내가 참회하여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가 라는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낭만주의 시대가 되면 타인의 죽음을 문제 삼아, 그 죽음이 주는 공허에 대한 나의 슬픔이 중요해집니다. 그 공허한 감정과 더불어 죽음은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되었답니다. 20세기가 되면 죽음은 은폐됩니다. 공포스럽고 불결한 것이기에 병원 한 귀퉁이로 감춰져 버립니다. 시대마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이렇게나 달랐었네요. 그러니 당연히 받아들이는 지금의 생사관 역시 다시 보아야겠지요.

그럼 왜 죽음의 문제를 사유해야 할까요? 그건 자유로울 수 있어서입니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잉여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生而死라고 하여 있음과 사라짐을 동일하게 봅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일리치가 본 예수의 죽음입니다. 일리치는 그리스도가 죽는 순간에도 자유로웠다고 말합니다. 그 자유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떠안을 수 있는 능력이고 고통마저도 삶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가 죄사함이라는 대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유로웠기에 죽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오롯이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가? 편안한 죽음, 고통 없는 죽음, 고귀한 죽음 등 죽음에 대한 상 없이, 다양한 죽음의 형태들이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과 가까운 자들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죽음의 대한 통찰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자신의 죽음이나 병에 대해 외부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자유롭게 죽음을 대면할 때 어떤 죽음도 고귀한 죽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주장하는 바 없이 살 수 있는가

주장하는 바란 자기합리화의 근거입니다. 보통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때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위 하는 걸 말하지요. 그래서 흔히 자기주장이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든 대의든 뭐든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기대어 살게 되지요. 장자에 따르면 이건 모두 유위 하는 삶입니다. 인위적인 것을 할 땐 언제나 하지 않으려는 힘이 함께 작동하고 이로써 논쟁이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열어구>편에는 인위를 행하지 않는 자가 나옵니다.

백혼무인과 대화하는 열어구는, 지나치게 성실하면 타인을 위엄으로 눌러 환난에 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러한 조건을 만들지 않고 겸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들이 방안 그득합니다. 이 모습을 본 백혼무인은 열자가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으려는 기이한 것을 끄집어내었다고 나무랍니다.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인위를 작동 시켰다는 것이지요. 세속 안에서 인위 하는 것도, 반대로 아주 탈 세속적으로 가는 것도 모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장자는 세속을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샘은 유가와 장자는 공유되는 지점이 있다고 합니다. 中 이나 安命 같은 개념을 함께 말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러다 어떤 지점에서 갈라집니다. 유가는 세상에 뛰어들어 각자 합리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비간이나 미자나 백이숙제처럼요. 명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덕목이 됩니다.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실존적’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이 유가의 안명이라고 말합니다. 中을 맹자가 말할 때도 어떤 상황에서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어떠한 준칙도 세워 놓지 않습니다. 준칙이 있다면 자연이치라는 겁니다. 선택자체가 실존이 아닌 ‘이치’에 따르는 것으로 올바름이나 시비를 떠난 세계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외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논쟁을 회피하기 위함입니다. 논쟁은 말함으로써 생겨나게 됩니다. 말은 규정이고 주장이기 때문이지요. 말은 형체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도그마화 되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 논쟁의 고리를 끊는 방식으로, 논리의 구조를 흩트리는 방식으로 도그마를 비판합니다. 샘은 장자 철학은 매번 도주선을 그리는 철학이라고 하셨는데요, 자연에 예외가 작동하듯 도그마가 작동할 때, 치고 나가는 사상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유가라는 세속적 사상에 도주선을 그은 사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자의 반전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주장을 종식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장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신의 논리를 회의해 보는 것입니다. 나의 사상을 회의 할 수 있는 힘으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철학은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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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2 15:28
    죽음에 대한 사유가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와닿네요. 자유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면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