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11월 14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1-12 19:45
조회
211
공지가 늦었습니다. 바로 공지부터 나갑니다. 이번 주에는 에세이 초고(10장)를 써오셔야 합니다(ㅠㅠ). 중간의 내용이 조금(?) 부실하더라도 결론까지 이르는 것이 이번 주의 목표입니다. 간식은 봉선샘과 윤순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 주 강의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12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익숙한 이야기지만, 사실 오이디푸스를 해석하는 가장 일반적인 키워드는 ‘지식’이라고 합니다. ‘부은발’이라는 오이디푸스의 별명은 ‘에이도스’, 즉 보이는 것(형상, 이미지, 이데아)과 연관됩니다. 설정 상 오이디푸스는 ‘보는 자’ 혹은 ‘아는 자’인 것이죠.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소포클레스는 ‘안다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아는 자인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풉니다. 즉 오이디푸스는 보편으로서의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무지는 그를 파멸로 이끌죠.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역설을 보여줌으로써 ‘앎이 관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푸코는 오이디푸스를 해석함에 있어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동시에 사유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오이디푸스 비극은 지식 일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유형의 앎들, 그리고 그 의례들 사이의 투쟁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신탁과 예언자의 말이 중심이 되던 앎의 유형과 ‘보고 들은 것’이 중심이 되는 다른 앎의 유형 사이에 있는 자입니다. 과거에는 신과 신에 속한 자들(예언자, 신탁)이 지식의 근원이었는데, 오이디푸스에 오면 이것은 ‘보고 들은 것’에 의한 ‘입증’을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진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의 신탁뿐만이 아니라 노예가 보고들은 것까지가 요청됩니다. ‘조사’와 ‘탐구’라는 새로운 지식의 유형 혹은 방법이 태동하고 있는 것이죠.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상이한 앎의 유형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중화되는 존재입니다. 그는 찾으려하는 자이면서 찾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들이면서 남편이기도 하죠.

푸코의 오이디푸스 해석이 지닌 독특성은, 그가 오이디푸스를 ‘무지한 자’ 혹은 인간의 앎의 무력함을 상징하는 자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 상이한 지식의 경계에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지식과 권력에 대한 푸코의 사유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사람들이 어떤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거나 반대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진실로 믿는 것은 권력에 의해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푸코는 니체를 따라 힘의지(권력)는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해석이고, 힘이 작동하는 곳에는 언제나 해석(지식의 체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식과 권력은 서로를 정당화하거나 서로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늘 쌍둥이처럼 동시적으로 작동한다는 것. 푸코는 어떤 행위에도 그 나름의 ‘앎’이 깃들어 있지 ‘무지’가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문제는 무지에서 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등록된 앎에 대해서 예속된 앎들을 봉기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겠죠.

푸코는 오이디푸스의 파국을 힘들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상이한 두 앎들 사이에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민주정과 참주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이디푸스의 파국은 그 자신의 무지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주는 우화도 아닙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억압과 결여가 아니라) 과잉과 위반을 통해 작동하는 지식-권력을 보여줍니다. 오이디푸스는 “신들의 신탁과 도시의 증언이 그것의 특정한 절차 및 그로부터 산출된 지식 형태에 따라 과잉과 위반의 인간으로 몰아 쫓아낸 권력-지식의 인간”(356)입니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모든 것, 오이디푸스를 둘러싼 모든 것은 과잉이다. 부모의 과잉, 결혼의 과잉, 아버지는 게다가 형이며, 딸은 게다가 여동생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불행의 과잉 속에 있으며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져야만 하는 사람.”(356)

푸코는 오이디푸스를 무지나 (결여가 외삽된) 무의식의 문제로 보는 해석들은, 우리의 사유 체계 안에서 지식을 권력(과잉과 위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낯선 일인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지식을 인식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관점에서 보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죠. 어떻게 앎을 지식-권력의 차원에서 볼 것인가!? 이번 에세이의 과제이기도 하겠죠... 에세이... 걱정이네요... 아무튼... 네... 파이팅입니다.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8-11-13 10:17
    오이디푸스가 '과잉'의 존재라는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상이한 앎들의 투쟁 한 가운데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의 격돌이 있었습니다. 옴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