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3장 1-2 후기

작성자
正玉
작성일
2016-07-13 11:25
조회
548
3장 1-2 후기입니다.

지난시간은 새롭게 개념을 환기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텍스트를 읽으며 기억해야 할 공리 같은 것? 사실은 매시간 얘기되는 것이지만 문구에 얽매어 자꾸 끈을 놓치고 마는 것들이죠.3장은 사회체 특히 자본주의 사회체에 대한 분석이다. 무엇보다 욕망이, 욕망하는 생산이 일차적이다, 68혁명 ‘이후’ 포기하지 않는 혁명에 대한 사유가 깔려있다. 등.

 

3장은 사회체에 대한 분석으로 자본주의까지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것입니다. 들-가는 역사를 원시 영토기계, 야만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로 나눕니다. 여기서 기계는 사회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회구성 이전에, 욕망이 우선한다고 했죠. 무엇이 ‘있다’라고 하면 욕망이, 욕망하는 생산이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네요. 그런데 욕망은 흘러다니는 것만으로는 구성되지 않죠, 그것이 접속하고 절단되고 코드를 부여하는 것에 따라 기입되는 표면이 생기는데 이것이 곧 사회체, 사회기계입니다. 이 사회기계의 역동성은 욕망 때문에 생기는데, 역동성이 곧 사회체인거죠. 구조는 이차적인 것. 그러므로 다시 한번 강조한 혁명은 구조나 핵심,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란 것, 혁명의 사유는 욕망에서 시작하여야 한다는 놀라운 발상. 이 욕망이 코드화되는 것이 영토화입니다.

 

영토화란 일정한 방식으로 코드를 부여하고 기능을 설정하여 “점유”한 것입니다. 영토화는 모든 생명체에 작용하고 있지요,(cf동물들의 영역표시, 교실 뒤 영역) 모든 영토는 영토의 작용으로 ‘화(化)’가 중요하다고 하셨죠. 化는 변화하는 힘이니까. 들-가에 따르면 영토화보다 선차적인 것은 변화하는 힘인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영토화가 이루어지면 반드시 영토화되지 않는 영토밖의 힘이 존재하는데 두 힘이 상존한다고 하셨죠, 이렇게 탈영토화한 달아난 힘은 다른 곳에서 다시 영토화하는데 이것이 재영토화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탈영토화하는 힘이 아니라 어떻게 영토화에 갇히지 않을까하는 것이지요. 탈영토화만 고민하다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대목이죠? 영토화는 그 영토에 맞는 코드화가 늘 함께 부여됩니다.

 

들-가는 사회체를 미개 야만 문명으로 나누었죠. -미개에서 야만으로 또 문명으로 진보하는 단선적 역사관이 이닙니다. 자본주의내에도 미개와 야만이 공존 - 욕망하는 생산에 코드화를 부여하여 어떻게 영토화가 형성되었나를 기준으로 나눈 것입니다. ‘개인의 욕망은 이미 사회적이다’ 라는 테제 아래 한 사회가 욕망하는 흐름에 어떻게 사회적인 것을 “투여”하는가? ‘코드가 어떻게 등록되는가’가 중요한 지점이 되는 거죠. 욕망하는 생산에는 사회적인 코드가 튜브를 꽂고 이미 우리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는 것이죠. 사회적 코드는 욕망의 실질적인 회로. 이것은 정신적인 문제 아닌 물질적인 문제. 뭘 먹고 싶고, 어떤 집에 살고 싶은 그런 욕망들.

 

들-가는 이 코드의 총체가 문화라고 했는데 니체의 개념을 빌려 설명하고 있죠. 문화는 잔혹함으로 고통과 함께 각인된 것이다, 고통의 댓가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부채블럭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원시는 통과의례를 통해 그 땅에 태어난 빚을 신체에 새김으로써 강한 기억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해결 못한 나머지 부분을 채무로 안는 구조. 특히 국가는 국민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영원히 빚을 갚을 수 없게 만드는 구조라는 것이죠. 자본주의 국가는 법으로 제도로 채권자 노릇을 하고 있지요.

자본주의는 어떤 사회에서도 극한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회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해체 할 때 까지 극한까지 욕망을 끌고 가 탈코드화하는 흐름, 탈코드화의 불안과 공포마저도 코드화해 버리는 마이더스 같은 힘이지요. 자산(빚)마저도 잉여로 만들고, 사유화마저 탈코드화한 모기지론등을 예로 들어주셨지요. 이처럼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와 분열증(극한까지 밀고 가는 힘)을 모태로 하고 있는데 이 힘들은 어느 사회나 있었던 것이지요. 잠재해 있던 탈코드화의 힘 때문에 다른 사회체들은 붕괴하였는데 자본주의는 그것마저도 포섭해 버리지요. 마지막에 자본주의가 있을거란 들-가의 관점은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부분이었던 같습니다.

 

또 재미있었던 부분은 항문에 관한 것이었는데 무척 안 읽혔던 부분인데요. 정신분석이 항문을 어떻게 오디푸스로 덧씌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화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부분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단위(기관)들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게 아니라 힘들이 흘러가는 대상일 뿐이죠. 남근이 어떤 상징성을 갖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엄마의 어떤 부분, 아빠의 생식기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힘의 강도이지요 정신분석은 이것을 모두 오디푸스로 회귀시키지만요. 이것이 현대로 오면 기관들의 사유화, 추상화가 이루어집니다. 추상화란, 입은 언제나 나의 입, 손은 나읭 손일 뿐. 입이 말을 할 때와 다른 입을 만났을 땐 의미가 달라지죠. 기관들이 인간에 귀속되어, 기능하는 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유화의 첫걸음이 항문이라는 건데요, 항문은 저장을 의미합니다. 자기에게 들어온 것을 스스로 조절하고, 축적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정신분석은 항문에 기능이상의 의미(승화)를 부여 합니다. 똥으로 양이 결정되고 이것이 화폐로 다시 추상되죠. 해서 항문에 의해 다른 기관들은 모두 철회됩니다. 그리고 오디푸스 차원에서 기능을 어떻게 사유화 해야하는지 재배치(재투자)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오디푸스로 ‘개인’을 만들기 위해 억지 투자 된 거죠. 똥과 섹스가 금기시 되지 않았던 원시사회는 오디푸스의 개념이 없었죠. 이름 붙여짐으로써 생겨난 오디푸스.

 

들-가의 종회무진하는 언어와 관점에 늘 놀라워하며 읽고 있지만 무척이나 힘겹고 부대끼네요. 내 안의 욕망을 보는 것도, 안락한 가족주의로 회귀해 버리는, 그게 너무 익숙하고 편한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도 쉽진 않죠. 또 가족관계나 리비도적 측면에선 대단히 보수적인 주변의 진보(?)적 사람들과 마주하는 일도.

화폐 따위의 몇가지 공리만을 남기고 모든 탈코드화하는 힘, 변혁마저도 집어 삼키는 자본주의의 이 분열증 앞에 까칠해지기가 쉽지 않네요. 토사곽란으로 힘든 일주일 후 난 차라리 자본주의이고 싶었답니다. 그 모든 것을 안고 그래도 우뚝 서는 자본주의. 그러나 샘의 가르침 앞에 망발은 거두고, 극한까지 밀어 붙이는 자본주의의 그 힘. 그건 거두어 보려구요. 건강 잘 챙기시구요. 불성실한 탕아는 늦은 후기 사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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