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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톡톡] 선각자(先覺者)의 깨달음: 집합적 실존의 인식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02 19:46
조회
278

선각자(先覺者)의 깨달음: 집합적 실존의 인식


 

맹자의 정치학은 기쁨의 정치학이다. 인정(仁政)은 ‘백성과 더불어 하는 즐거움(與民同樂)’을 산출하는 정치다. ‘인정’을 펼치는 성인들은 구체적 정책이 달라도 백성들을 기쁨(悅)으로 인도한다는 데서 공통된다. 그들의 정치는 단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는다. 순임금이 아버지 고수와 동생 상을 사랑으로 감화시켰듯이, 군주가 인의(仁義)로 통치하면 백성들도 모두 ‘인의’에 따르도록 감화된다. 이른바 ‘절대적 사랑(愛)의 정치’랄까? 이는 스피노자가 상상하는 이상적 국가와도 일맥상통한다. 스피노자가 꿈꾸는 국가는 누구든 철학하고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보장된 국가다. 시민들은 특정 법률의 폐지를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동시에 그동안 법률에 위배되는 행동을 자제한다. 주권자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수렴하고, 그들이 이성에 따라 일치할 수 있도록 새로운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질서를 견고하게 만든다. 정치적 이견은 사회의 평화를 위해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모두가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요소다. 맹자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데서 만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정치론에 비하면 맹자의 정치론은 위계적으로 느껴진다. 가령, ‘인정’에서의 기쁨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그레이엄에 따르면, 맹자의 정치론에서 ‘인정’을 펼치는 군자(君子)가 빠지면 백성들은 극도로 무기력해진다. 전국시대의 백성들은 스스로 내재된 선(善)을 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 직면한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士)들이 철학적으로 왕을 가르침으로써 백성들을 보살피는 정치를 시행하게 만들고, 실무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림으로써 마음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인정’은 ‘사’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에 의해서 ‘인정’이 실천되는 동안 백성들은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는 걸까? 사회가 기쁨으로 감염되기 위해 백성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앎을 ‘사’들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걸까?

정치에서 통치하는 자와 통치 당하는 자의 구분은 지금도 견고하게 작동하는 믿음 중 하나다. 내가 기존의 정치에 비관적이었던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통치 당하는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치 당하는 사람은 통치하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 정치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력해서 통치하는 사람에게 의견을 전하면 다행이지만, 내가 전한 의견이 그대로 수용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러한 사고는 정치를 내가 참여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의 활동으로 간주하고, 통치하는 사람과 통치 당하는 사람의 분리는 정치에서의 위계를 상정한다. 통치하는 사람은 통치 당하는 사람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진리’를 ‘먼저’ 깨달아서 소유해야만 한다.

정치에서 통치하는 자와 통치 당하는 자를 구분하는 사고, 요컨대 계몽적 정치 구도는 둘 사이의 위계뿐만 아니라 ‘주어진 진리’를 상정한다. 그런데 발리바르에 따르면, 합리적 인식만으로는 결코 현자에 대한 무지자의 복종관계를 확립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합리적 인식은 다시 한번 미신으로 전환될 것이고,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신학자들이나 주교들이 될 것이다.”(《스피노자와 정치》, 144쪽) 그리고 주어진 진리를 전제하는 정치는 모두의 앎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동일한 신체, 동일한 세계관을 전제한다. 즉, 구성원들을 ‘환원 가능한 신체’로 간주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즐거움은 항상 조건적으로 성취된다. 결핍된 앎이나 경험을 채울 때만 일시적으로 즐거움이 느껴지고, 보다 큰 진리/즐거움을 성취하기 전까지 다시 어떤 앎이나 경험의 결핍을 전제하게 된다.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진리/즐거움이 있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긍정하기 위해 초월적인 무엇에 기대고 미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계몽적 정치는 미신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정치다.

반면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개체를 환원 불가능한 독특한 실재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전혀 계몽적이지 않다. 모든 개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앎은 없다. 또한 주권자를 포함해서 모든 구성원들은 다중을 구성하는 정치적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 한 사회의 무능력은 주권자에게 복종하지 못하는 구성원과 주권을 집합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주권자의 정념적 예속에서 기인한다. 주권자를 포함한 구성원들의 실존은 그 자체로 다중의 역량의 표현이다. 구성원들 사이에 상호의존성의 동요가 심해지면, 사회 개체는 “마침내 자신을 파괴할 다중의 분노를 산출하고 만다.(103쪽)” 반대로 구성원들 사이에 상호의존성이 견고해지면, 사회 개체는 구성원들이 주권자의 명령에 복종할 자유를 산출한다. 즐거움은 구성원들이 의사를 표현하면서 기꺼이 공동체의 명령에 따르는 자유에 비례한다.



《맹자》에 나오는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도 계몽적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맹자가 말하는 ‘먼저 깨달은 자’는 남들이 정념에 예속돼있을지라도 자신의 실존을 집합적으로 사유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앎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정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만장 상〉 7장에서 ‘먼저 깨달은 자’로 이윤이 등장한다. 처음에 이윤은 밭을 갈며 요순의 도(道)를 즐기며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거듭된 탕임금의 초청에 의해 이윤은 마음이 바뀐다. 그는 탕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그의 백성들을 요순의 백성들로 만들어 요순의 시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윤은 ‘아직’ 요순의 ‘도’를 알지 못하는 탕임금과 백성들에 비해 더 우월한 앎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윤을 비롯한 성인들은 자신의 우월한 앎을 전달하기 위해 통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바로잡을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희생을 감수하거나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편법을 쓰지 않는다.

계몽적 정치 구도에서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더 큰 즐거움을 위한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당연하다. 이윤이 만약 계몽적 정치를 생각했다면, 세상에 요순의 ‘도’를 전파하기 위해 요리로 탕임금의 관심을 끄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에 따르면, 성인은 ‘도’를 현행적으로 실천한다. 조정에 있든, 조정을 떠났든 ‘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더럽히는 아주 작은 치욕을 감수했다면, 그것은 ‘도’를 실천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조그마한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더 많은 백성들이 더 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맹자가 말하는 정치에서의 기쁨도 현행적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은 백성들을 어떻게 기쁘도록 만드는 걸까? 성인이 소유하는 앎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백성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보다 많은 것들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게 되는 걸까?

계몽적 ‘먼저 깨달은 자’는 존재론적으로 백성들보다 우월하다. 그들의 우월함은 자신보다 열등한 자들, 아직 자신의 깨달음을 습득하지 못한 자들이 있는 데서 성립한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모두 소유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이 열등하다고 간주했던 자들과 똑같이 결핍을 겪게 된다. 그러나 맹자의 ‘먼저 깨달은 자’는 존재론적으로 백성들과 동등하다. 그들도 백성들과 똑같이 정념에 예속된다. 계몽적 ‘먼저 깨달은 자’와 달리 전지전능한 통치자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돌이킴으로써 자신에게 내재된 선을 발현한다. 통치자는 백성들이 따라할 수 있는 모범이 되긴 하지만 자신의 진리를 그들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백성들이 자신을 본받음으로써 마치 자신에게 내재된 선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을 인도할 뿐이다. 백이, 이윤, 유하혜 등 성인들의 구체적 행동이 조금씩 다른 이유도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진리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맹자의 ‘먼저 깨달은 자’는 ‘나중에 깨달은 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자기 실존에 유리해진다. 왜냐하면 ‘나중에 깨달은 자’들도 기쁨을 현행적으로 느끼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느끼도록 자신의 고유한 관계를 조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의 철학에서 군주와 ‘사’, 백성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함께하기를 시도하는 만큼 자유가 실천된다.

글 : 규창

전체 4

  • 2020-09-03 09:42
    정치에서 슬픔을 느끼기 쉬운 요즘 기쁨의 정치학이라니 눈길이 갑니다.^^ 위계로 인해 평등하지 않다고, 또는 배제되어 있는 계급이 있다고 느껴지지만, 각각의 위치에서 기쁨을 생산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주장하는 기계적 평등보다는 가치있는 정치담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인간이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각기 다름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려하는 시도가 바로 맹자의 정치적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 2020-09-08 10:40
    정치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우월감/열등감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결핍된 앎이나 경험을 채울 때만 일시적으로 즐거움이 느껴지고, 보다 큰 진리/즐거움을 성취하기 전까지 다시 어떤 앎이나 경험의 결핍을 전제하게 된다."
    나 혹은 다른 이의 결핍을 전제할때만 성립되는 행복/불행, 우월감/열등감이라니 얼마나 초라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나중에 더 많이 깨닫는 이들에 의해 더 실존에 유리해지는 앞선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차원일지, 증가하는 기쁨에 의해서만 커져가는 깨우침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고 갑니다~

  • 2020-09-09 14:54
    목적이자 이상으로서의 즐거움/진리의 상이 주어져 있는 한 배제의 논리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재밌네요.
    그런데 그 뒷 부분에 나오는 '상호의존성'이 뭔지 궁금합니다. 환원불가능한 독특한 실재인 각각의 개체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룰 수 있는지, 이때의 의존이란 어떻게 자유이고 평등일 수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어떻게 배제하지 않는 정치가 동시에 동일화에 반하는 정치(그러니까 개체들의 환원불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일 수 있는지도 감이 잘 안 잡히는 것 같습니다.

  • 2020-09-11 07:56
    선각자의 깨달음 : 집합적 실존의 인식이란 제목에 낚이였습니다. 실존을 수식하는 '집합적'이란 의미가 무엇인가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상호의존하는 존재이니 집합적이란 말이 공동체나 사회를 의미하는 것인가요. 선각자는 집합적 실존(자)인가요. 질문만 떨어뜨렸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