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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자신과의 동고동락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09 08:55
조회
247
'불이야기'는 규문 불교팀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이 불교 공부를 하면서 품게 된 '한 생각'을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모두가 붓다 되는 그날까지!


자신과의 동고동락(同苦同樂)


 글/ 경아


대승기신론에서는 우리의 인식작용을 무명에 의한 망심훈습妄心熏習과 무명을 벗어나는 진여훈습眞如薰習으로 나눈다. 망심훈습은 무상한 인연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습과 기억대로 분별하는 인식작용이다. 과거에 경험대로 살면서 지금의 마음 작용을 놓치는 것이기에 妄心이다. 과거의 기억이 변형 없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 시점의 ‘나’는 지금의 ‘나’도 아닐뿐더러 우주 만물 뭐 하나 그때 그대로가 아니다. 그래서 기억과 현재적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상상하는 우리의 인식작용이 무명이다. 무명이 있어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자체가 무명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는 이 무명에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나와 대상을 변치 않는 어떤 것으로 실체화하면서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라고 이름 붙인다. 단지 선악오호미추 이름 붙이는 것이 왜 괴로움이 될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단지 좋고 나쁨을 분류하는데 끝나지 않기에 문제이다. “의지와 지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2-49, 따름정리)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의 감각, 지각, 의지, 판단, 이해 등은 모두 세트로 다닌다. 어떤 냄새를 맡자마자 좋고 싫음의 느낌, 취할 것인가 피할 것인가의 판단까지 한순간 쫙 펼쳐진다. 어떤 것을 감각하는 것이 의지나 판단 등과 칼같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끔 대화가 끊기는 어색한 상황에서 꺼내는 시시껄렁한 농담조차도 잘 생각해보면 의도하는 바가 있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조금만 솔직히 자기 마음을 파보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고 남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게 될 때, 이웃도 나와 비교되는 이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재단하지 않듯 나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살 수행자들이 뭇 생명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업식의 불편함도 소멸시키는 비밀입니다. (『대승기신론 2』, 법공양, 86쪽)

무명을 벗어나기 위한 진여훈습에는 內因으로서의 진여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과 外緣으로서의 용훈습用薰習이 있다. 진여는 인연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삼라만상의 본모습이다. 진여는 그렇게 본래 펼쳐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진여 자체상훈습이다. 진여에 대한 이런 믿음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어떤 작용에서도 진여를 보는 것이 용훈습이다. 정화스님은 보살의 보시,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섭同事攝의 사섭법四攝法으로 용훈습을 설명하신다. 법화경 화성의 비유에서 무비스님이 동사섭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 설명하셨다. 깨달음의 길이 힘들다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수준에 맞는 방편을 행하라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정화스님은 동사섭을 자신에게 먼저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자신과 동고동락하는 습관”이 먼저 들어서 자신을 충분히 감싸 안아 편히 쉬게 해야 이웃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 바닥 속에 있는 외로움과 억울함을 모두 끌어내서 바닥이 드러나 울음이 멈추어야 “드디어 고향 땅에 서 있는 스스로를 실감하고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살 때”(42쪽) 훈습할 무명이 없어진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신다.

무엇인가 반복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망심훈습 때문이다.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한 사람이 아닐 수 있는데 나랑은 케미가 맞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케미, 취향에 나의 모든 판단과 기대가 들어있다. 한마디로 내가 만들어놓은 相 대로 상대가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마음 하나 어떻게 해보지 못하면서 상대를 내 마음 대로 하고 싶은 기막힌 욕심이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께서 “알고 하는 놈이 더 나쁘다.”고 한 대 더 때리시곤 하셨다. 지금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레테르만 스스로 붙여놓고 상대에 대한 불편함 감정에 자책으로 꿀꿀함까지 더하면 무거워지곤 한다.

Doppelgänger - Wikipedia

상대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정확히 말하면 나에 대한 불편함이다. 나는 그런 태도나 말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아이의 버릇없는 말투, 남편의 잔소리, 요구를 당연시하는 부모님의 한마디에 발끈하는 것은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각자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욱하는 것이 그 상대와 내가 쌓아온 것들 때문이니까 매번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내 마음대로 고칠 수 없으니 내가 최대한 그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던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재택하며 아이에게 끊임없이 잔소리 하는 남편을 직접적으로는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아이에게 잔소리를 의도적으로 끊으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개도하려 참고 참다가 아이에게 분노 폭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말대꾸를 시작한 아이 앞에서 조금 전까지는 천사 같은 아이였으니 지금 저 악동의 모습만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야 등등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잘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의 잔소리, 아이의 말투, 부모님의 요구에 발끈하는데 뭔가 공통점이 있으리라 추측만 하고 있었는데, 정화스님의 글을 보면서 ‘당신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라는 억울함이 와 닿았다. 상대와 나의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상대만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 억울함으로부터 나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 반응방식이 납득된다. 아이에게는 명령조, 남편 말은 왕무시, 부모님의 요구에는 자포자기 방식의 응대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것도 이해했다고 볼 수 없고 요즘 말로 강력한 쉴드치기였다. 그러니 관계를 통해 행위역량이 증대되는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쳐내버리는 식으로 겪어내면서 힘이 빠지곤 했다.

많은 것과 관계한다고 변용역량이 큰 것은 아니다. 드러나는 대상이 하나일지라도 그 하나 속에 총상인 우주만물 작용 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하나와의 관계도 우주 만물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 양태는 다른 양태와 관계하지 않고는 실존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인연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나 아닌 것이 없다며 말로만 줄줄 외면서, 일상에서는 ‘번뇌 없음’의 코스프레를 위해 관계소거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나만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억울해하고 있었다. ‘나라고 생각하는’ 허상을 붙들고 다른 모든 접속을 그 허상 기준으로 판단하니 억울할 수밖에 없다. 허상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벗어나기에 만족시켜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상인 나를 중심에 두는 사고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말한다. 이 허상을 놓아주는 것이 자기와의 동고동락을 시작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라고 생각하는’ 허상을 놓을 때 상대가 나를 향해 쏜다고 착각했던 화살이 더 이상 상처가 아니게 된다. 왜냐면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놓아버렸기에 더 이상 상처받을 ‘나’라는 과녁이 없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집에서 서로 지지고 볶는 것이 코로나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모든 것이 멈춘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지난 시간 선생님의 주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의 해체를 찍고 있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또 다른 가족을 실험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체 2

  • 2020-09-09 10:22
    맞아요, 결국은 자신과의 동고동락이네요. 나라는 허상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억울해하는 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 외우고 암송하고 또 생각하고 또 고민하다보면 죽기 직전이라도 조금 벗어나게 될런지. 도반의 지혜를 다시 새롭게 읽고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시작합니다.

  • 2020-09-09 10:24
    코로나 시대가 정말 많은 것을 바꾸고 있군요. 가족들이 한 집에 오래 모여서 오히려 해체될 위기! 이때 특정 시점의 나에 집착하면 오히려 지금의 마음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자기에 대한 생각에 갇혀서 다른 것과 관계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 그럼 억울함 게이지만 올라가게 된다는 것...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