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청년 톡톡] 중화리괘(重火離卦) : 존재는 우주의 선물이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14 14:45
조회
335

중화리괘(重火離卦) : 존재는 우주의 선물이다


 

‘세상 망해버렸으면.’ 장난삼아 내뱉는 말이 장난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연구실 생활을 하다 보면 멤버들의 낯선 모습들을 보게 된다. 생각 외로 어른스러운 점을 발견해서 놀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실망스러운 점을 보게 된다. 이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가 장점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단점이기도 하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이기에 서로를 보완하며 살아가기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멤버들이 (내 생각에) 무책임한 모습을 보일 때, 개입하기보다 냉소적으로 단념하고 만다. 나와 관련 없는 세미나일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거리를 뒀다. 나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말해봤자 바뀌겠어’라고 상대방을 평가하며 스스로 단념한다. 그리고 이 단념이 가장 심해졌을 때 ‘세상 망해버렸으면’과 같은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이런 나의 냉소적인 태도의 원인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나의 게으름과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소심함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작심삼일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도 분명한 분석과 적합한 해결책이 필요하듯, 내가 냉소적이게 되는 원인에 대한 분석과 그것을 넘어가기 위한 구체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나는 왜 개입하기보다 냉소적인 데서 그치는 걸까?



중화리괘(重火離卦)는 두 개의 불이 붙어있는(麗) 모습이다. 여기서 두 개의 불이란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불이 아니라 다른 것에 옮겨 붙어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불을 말한다. 옮겨 붙은 두 개의 불길 중 무엇이 더 강한 불인지, 어디서 불이 붙기 시작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불을 옮겨 줄 수 있을 만큼 불을 키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을 옮겨 받을 수 있을 만큼 재질을 갖췄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리괘에서 봐야 하는 것은 불이 옮겨지는 과정, 두 개가 만나서 불을 나누게 된 관계다. 정이천도 리괘를 소개할 때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만물은 모두 붙어있는 바가 없지 않으니, 형체가 있으면 붙어있음이 있다.(萬物莫不皆有所麗 有形則有麗矣)”

붙어있음이란 곧 ‘관계맺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체가 있으면 붙어있음이 있다’는 것은 개체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 방식은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꽤나 잔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것과도 관계할 수 있고, 우리가 관계했던 모든 것과 언제든 다른 식으로 관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 선택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대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실존 조건이다. 나의 삶이 어떤 것과 관계 맺으면서 어떻게 굴러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기피해왔던 것들을 실험하고, 출구 없다고 여긴 상황에서조차 새로운 길을 발명할 수 있다. 리괘의 윤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맺음을 삶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지위는 개체 중에서도 독특하다. 해와 달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만물을 고루 비출 수 있고, 온갖 곡식과 초목은 땅에 있기 때문에 해와 달의 은택을 받을 수 있다. 인간도 땅에 있기 때문에 해와 달의 은택을 받는다. 동시에 인간은 의식적으로 다른 개체에게 은택을 입힐 수 있다. 정이천은 “사람의 경우에는 친하게 붙어있는 사람과 행하는 도(道)와 주관하는 일이 되니, 모두 붙어있는 것이다(在人則爲所親附之人 所由之道 所主之事 皆其所麗也)”라고 말했다. 인간은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붙잡고 때로는 붙잡음을 당한다. 그러나 되는 대로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나름대로 어떤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를 고민하며 자기만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겪는 일들을 해결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親附之人), 자신의 원칙(由之道), 해결해야 할 일(主之事)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연결망을 형성한다. 인간은 자신이 놓인 연결망을 피하거나 취사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 그 연결망 속에서 살아갈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개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개체들은 연결망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만이 자신이 놓인 연결망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번뇌를 겪으면서 관계를 재조직한다. 인간은 번뇌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번뇌를 경험하면서 무기력해지는 지점을 이해하고, 실존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원칙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일들을 처리하는 실천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한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 인식되는 상대방도 특정한 형태로 구성된다. 따라서 내가 다르게 살아가기를 결심하지 않고 상대방만이 바뀌기를 바랄 수 없다. 반대로 내가 세상과 다르게 공명하기를 시도할 때, 나와 상대방의 관계는 다르게 맺어진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내가 멤버들을 이해하고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순간이다. 내가 멤버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그만큼 불만이 쌓였다는 신호다. 이 불만은 내가 처음 연구실에 왔을 때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내 공부만 신경 쓰던 때는 누군가 미리 밥이나 청소를 해줘서 내가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그것을 잘한 사람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고, 반대의 경우에는 깔보고 미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부할 준비에 소홀히 하는 것, 자기 것에만 매몰되는 것에 좀 더 불만을 갖게 됐다. 물론 이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나의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마음 어디선가 깔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전보다 위험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아는 것도 전무하고 서로에 대해서도 낯선 지점이 많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주워들은 게 있고 서로에 대해 많은 모습들을 알게 됐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게 많이 없어졌다. 더 망동하기 쉬워진 것 같다.

현재 연구실 멤버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리괘의 구사효와 비슷하다. 구사효는 올바름에 따라 변혁하지 못하고 사욕에 사로잡힌 효다. 육오효의 군주를 몰아내고 자신이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급하게 오는지라 기염이 불타는 듯하니, 죽으며 버림을 받는다.” 《주역》에서는 변혁의 때에 타인을 깔볼수록 더욱 위험하다고 말한다. 확실히 지금 나의 냉소적인 태도를 일관하다 보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정이천은 구사효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구사효의 행하는 바의 불선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상해를 입을 것이므로 ‘사여(死如)’라고 말하였고, 계승하는 뜻과 윗사람을 받드는 도를 잃은 것은 모두 패역(悖逆)의 덕이니, 사람들이 버리고 끊는 바이므로 ‘기여(棄如)’라고 말했다. 죽고 버림받음에 이름은 화가 지극하다. 그러므로 흉함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사효는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 다른 효들이 구사효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은 그런 사람의 실존이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내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보면, 나는 스스로 나의 연결망을 파괴함으로써 버림받고 죽을 수도 있다.

한동안 나는 연구실과 다른 멤버들에게 도움을 베푼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침에 일찍 나오도록 동거인들을 깨우고, 그들이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공부에 몰두하도록 밥을 하고, 신경 쓰지 않는 곳을 내가 청소한다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내가 그들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연구실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이다. 여기서 누가 누구의 일을 대신해준다는 시혜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생각들은 ‘내가 한 일들’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한 일들’을 인정하지 않는 타인을 미워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암소처럼 우직하게 순종하는 덕이다. 여기서 순종은 단순히 나의 화를 참고 상대방의 의견에 수긍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다. 순종하려면 오만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만함은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만큼 저절로 덜어진다. 정이천이 리괘에서 허(虛)를 강조한 것도 우리의 역량은 나 자신의 아집을 비우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해와 달이 하늘에 붙어있고, 백곡초목이 땅에 붙어있듯이, 자신도 어딘가에 붙어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저절로 아집을 비운다. 아집을 비운 자는 저절로 이 세상에 순종할 수 있다. 따라서 순종이란 내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취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다. 인간의 위상은 해와 달, 백곡초목과 나란할 만큼 완전하지만, 또한 이 우주에서 어떤 것도 나보다 불완전하지 않다.

나는 이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내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살고 있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죽음이란 사건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삶의 종착지가 죽음이라고 해서 삶 자체가 슬픔에 지배될 어떤 필연적 이유도 없다.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삶이 언젠가 끝날 것임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해체되는 사건들을 미리 알더라도 지금 내가 삶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이 전혀 변질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삶 자체를 슬픔으로 느낀다.

그런 점에서 ‘세상 망해버렸으면’과 같은 말은 세상과 삶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기력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에 대해 쉽게 실망하는 것은 세상이 나만을 가혹하게 기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망상을 굳게 잡고 표류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개차반 같이 살아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주역》이 반복해서 말해주듯,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나’로 환원되지 않는 에너지를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나’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언제든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다. 형태를 가지고 우주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나 삶을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방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가 나에게 선물한 모든 것을 발로 차는 짓이다.

리괘를 본 성인은 밝음을 이어 사방을 비춘다. 나는 여기서 ‘밝음을 잇는 것(繼明)’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밝음을 잇는다는 것은 원래 우리의 존재가 그 자체로 밝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불을 건네받았고,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불을 건네줄 것이다. 이렇게 밝음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그만큼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밝았다면 밝음을 잇는 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불을 건네받고, 건네주는 고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내가 공동체 안에서 무기력하게 방관하는 것도 줄어들 것이다.

글 : 규창

전체 3

  • 2020-09-14 20:17
    재밌게 잘 읽었어요. 공동체에서 공부하면서 느끼는 고민들이 손에 잡힐듯 확연하게 다가오네요.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 또는 안 하는 걸 못 참아서일때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힘이 부칠 때는 주변을 탓하게 되고요. 내가 할 만하면 하고, 아니면 마는 거지요. 거꾸로 지금 내가 그 일을 하는 건 몸과 마음이 다 할만 하니까 하는거지요. 공동체에 필요한 일인데 내가 안 해서 그 일이 안 되면 그때는 공동체 차원의 해결책이 모색되겠지요. 내가 안 한다고 해서 망하는 일은 없어요. 내가 우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니까요. 규창이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네요.

  • 2020-09-16 15:58
    규창쌤, 주역을 녹여낸 글이 한줄한줄 마음을 파고드네요. 학창시절 시험공부 안하고 땡땡이 칠 때 시험날 '전쟁이라도 났으면, 학교에 누가 불이나 지르지'이런 해괴한 망상을 피우곤 했지요. 그런 버릇은 지금도 조금 다른 형태로 피어오르죠. 세미나 숙제를 안 한 날이면 해온 사람한테 은근 심술이 나고, 뭔 바지런을 저리 떠나, 이런 유치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 나를 또 한심하게 보는 다른 내가 있죠. 번뇌란 이렇듯 삶에 직면해 그것을 억척스럽게 개척하지 못할 때 생기는 어둠인 것 같습니다. 저도 '붙어산다'는 이 절실함을 순간순간 잊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잘나서 살지, 너 따위가 내 인생에 뭐 중요해, 이런 위험한 망상이 오십줄을 넘은 이 나이에도 점검해야할 사안이랍니다. 사람 귀한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규창샘 글을 읽으며 아주 신선한 뉘앙스로 전달받습니다.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해요. 맛있는 거 드시고 계속 좋은 글 써주세요~~~

  • 2020-09-28 00:18
    밝게 빛나는 불의 형체는 텅비어(虛) 있다는 리괘의 통찰이 놀랍네요! 붙들고 있는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때, 비로소 연결되어 빛날 수 있다(繼明)는 것이군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인에 대해 끝까지 기대하고 붙드는 것이 있으면, ‘세상사 망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훅 들이닥쳐 자신을 힘들게 할 것 같습니다.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그렇고 말고요. 인정받고 싶은, ‘내’가 한 일들에 대한 마음에 매여 있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집임을 성찰한 규창샘은 리괘의 虛에 다가가신 것 같은데요. ‘나’로 환원되지 않는 나의 삶, 언제든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관계 속의 삶을 리괘로부터 읽어 내신 규창샘의 지혜가 무기력한 방관을 뚫고 조우사방(照于四方)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