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청년 톡톡] 평등을 다시 생각하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19 20:56
조회
313
평등의 권리와 동정의 도덕

지금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고 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정치, 노동, 인권, 환경, 교육, 성 등 어느 분야에서나 논쟁의 기초가 되는 ‘평등’이라는 문제. 그리고 서점 가판대나 미디어의 상당 부분을 채우고 있는 위로와 힐링의 메시지, 즉 ‘동정’이라는 문제. 나는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평등 개념이 얼마나 노예적인 발상인지, 동정 도덕이 얼마나 무력하고 교활한 처세인지 손쉽게 비난해왔다. 뒤로 빠져서 남들 손가락질 하기는 쉬운 법이다. 며칠 전 나는 형과 전화를 하다가 내가 평등과 동정이라는 문제를 단순화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부터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형은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생각 중이다. 둘은 사이가 좋다. 형 특유의 사교성으로 어머님의 점수도 따뒀고 여자친구도 어차피 결혼할 거면 본인과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형의 걱정은 우리집의 형편이다. 상대 쪽은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건물이 몇 개 있고 부모님이 고위직에 계신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형은 적은 월급의 회사원이며 모아놓은 재산도 없다. 형은 아직 아빠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하지 않았다. 이 푸념이 갑작스런 것은 아니어서 전부터 나는 그럼 잘 된 거 아니냐고, 형수님 말씀 잘 들으라고 말하곤 했었다. 아니면 작은 집에서 시작하는 신혼도 멋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형의 곤혹스러움이 이해가 갔다. 내가 별생각 없이 던졌던 조언은 사실 공상에 가까웠다. 우선 상대쪽이 거부하면 그만이다. 설령 결혼을 한다 해도, 둘이 형편이 비슷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에서 어떻게 위축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장모님이 마련해준 신혼집에서 산다는 건 어떨까? 쉽지 않은 문제 같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계급 불평등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의아했던 점은, 아주 잠깐이지만,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차라리 상대도 넉넉치 않은 형편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게 들었다는 것이다. 또 왜 이렇게 차이가 나야 하는 건지,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탓할 대상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넉넉한 집안을 탓해야 하나, 우리 집안을 탓해야 하나? 아님 이 사회의 시스템 전체를 탓해야 하나? 그러나 “자신의 열악한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든 자기 자신 탓으로 돌리든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니체, 《우상의 황혼》, 책세상, 169쪽) 누군가 이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 다음에는 사실상 동일한 것인 두 가지 반응이 따라 나온다. “내가 천민이면, 너 역시 천민이어야 한다”(169쪽)는 식으로 가진 자 혹은 “사물의 총체적인 면에 대한 분노”(니체, 《안티크리스트》, 책세상, 305쪽)를 표현하거나, 아니면 무력하게 자신과 같은 처지를 동정하거나(또는 동정을 구걸하거나). 한쪽은 투덜투덜하고 한쪽은 토닥토닥하지만 둘 모두 자기 자신을 고통받고 결여가 있는 자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저들이 나쁘기에 내가 선하다는 노예도덕의 두 표현이다. 그리고 필히 그들은 스스로 바쁘게 그리고 기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은 자들, 그러고 싶지 않은 자들이다.

평등이라는 권리와 동정이라는 도덕은 원한 감정의 뿌리에서 자란다. 평등 관념은 원한에 의해 만들어지며 원한을 강화한다. 니체는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전제를 “이 허위, 천한 성향을 지닌 모든 자의 원한을 위한 이 구실”(317쪽)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교가 모든 지치고 짐진 자와 병자들을 빨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불멸적 영혼’으로 동등하다”(274쪽)는 선언 덕분이었다. 그것은 상처받은 자들에게 상당한 위로와 동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영혼의 평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사제들은 그들이 결여한 것을 가지고 있는 저 강하고 특권적인 자들을 지목했다. 시기와 복수심을 ‘평등’이라는 정의의 이름으로 표현한 이 최초의 “계급과 특권과 질서와 정식에 대항한 봉기”(250쪽)는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승리해왔고, 근대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만인 평등권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승리했다.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언제나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피로한 자들의 “염세적 시각, 추하게 만드는 눈”(305쪽)이 발견하고자 하는 불평등.



사람들은 자신보다 위에 있거나 많이 가진 자들 앞에서 불평등이라고 말한다. 혹은 자신보다 덜 수고하고 고통받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자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다. 의사들이 공정성을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평등의 기준은 단순한 돈이나 지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실 평등이라는 관념은 써먹기 나름이어서,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트나 의사나 공무원이나 모두가 사용할 수 있다. ‘평등’이라는 권리가 마치 무기처럼 소환될 때, 그것은 “높이를 갖고 있는 것에 대적하는,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의 봉기다.”(275쪽) 평등을 외치는 자들이 대적하는 것은 ‘높이’다. 높이란 계급적, 경제적 지위이기 이전에 세상의 상식이나 가치로부터 부단히 간격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존재 방식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176쪽)이 바로 높이다. 바로 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자, 지금 여기서 뭔가를 다르게 하고 싶지 않은 자, 피로한 자만이 건강하고 높이를 가진 자를 저지시키고 끌어내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논리와 힘으로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기에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진리처럼 보이는 권한인 평등 개념을 등에 업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보자. ‘인간은 원래 평등한데, 왜 경제적으로는 불평등한가?’라는 생각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인간은 원래 평등하다는 전제는 인간의 무엇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건가? 신체도, 언어도, 고향도, 성격도, 배움도, 잘 하는 일도 다 다르지 않은가? 니체는 “불평등한 권리가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다.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부당하다”(307쪽)고 말한다. 오히려 서로를 동일한 척도 아래의 개인 하나로 일률화시키는 것이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런 식의 동등한 개인들이라는 기본 전제가 없으면 경제적으로 비교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는 전혀 다른 욕망과 생활방식과 신체를 가진 존재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결여는 동일성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한다. 권리의 평등이 주장되는 곳에서야 특권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평등을 권리나 단순한 제도가 아닌 수준에서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출발점에서 전제된 권리의 평등이 아닌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능력과 활동으로 도달되는 평등은 불가능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비참한 것은 비슷한 수준의 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점 같다.

글 : 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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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개념의 타락

지금 우리 사회에서 ‘특권’이라는 말은 일관되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어떤 정치인이나 그 가족이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나 그런 의혹이 제기되면 해당 정치인의 정치인생은 어김없이 위기를 맞는다. 별 시답잖은 과거의 일을 놓고 지난한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을 모두가 똑같이 겪기를 바라는 것 같다. 마치 병에 사로잡힌 사람이 건강한 모든 이들이 자신의 고통에 책임이 있기라도 한 양 그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자신이 겪은 곤경을 피해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남들이 자신과 똑같은 곤경을 겪고 똑같이 병에 걸린다고 해서 자신의 고통과 좌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것은 자신이 겪고 있는 것들을 조금도 존중하거나 긍정하지 못하는, 즉 스스로의 삶에 대해 일말의 긍지도 갖지 못한 자의 심리 상태가 아닐까? 자신이 겪고 있거나 겪어야만 했던 모든 것들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따라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겪음’을 스스로의 힘과 욕망과 의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 이것은 자기 모독이 아닐까?

그런데 특권에 대해 생각할수록 의문이 든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이란 무엇인가? 평등을 도그마화하며 우리가 거품 물고 비난하는 그 특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정체는 병역문제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병역문제에 있어서 특권이란 무언가를 덜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편법을 써서 군대를 빼거나 휴가를 늘리는 것, 군대 안에서 모두가 해야 하는 수고로운 일들을 면제 받는 것. 군병원에 입원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시간을 때우거나 소위 ‘꿀보직’을 배정받아 편안한 군생활을 하는 것. 그렇다. 이 모든 특권들은 ‘하지 않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시대의 특권은 남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데에 있지 않다. 무언가 겪어야 할 것들을 건너뛰고 모면하는 데 있다. 니체는 “가장 강한 인간으로서 가장 정신적인 인간은 그들의 행복을, 다른 자들이라면 몰락을 발견하게 될 바로 거기에서 발견한다”(니체, 《안티크리스트》, 책세상, 305쪽)고 말한다. “삶은 높이를 더해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며―추위도 심해지고 책임도 커진다”(같은 책, 306쪽)고도 말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특권을 알지도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비교불가능한 의무를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특권, 즉 ‘행하는 것’으로서의 특권을 우리는 이해하지조차 못한다.

군대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행하지 않음’으로서의 특권을 열망한다. 불로소득에 대한 꿈은 그 전형이며,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자하는 것도 무언가를 겪지 않고 지나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여행도 가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들도 많다. 그러나 당장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들을 행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마련된 상태를 상상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권리 개념 자체의 타락이다. 니체에 따르면 “권리의 불평등이야말로 진정 권리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며 “권리는 특권이다. 각자의 존재 방식에서 각자는 나름의 특권을 갖는다.”(306쪽) ‘행함’으로서의 권리란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즉 ‘평등한’ 것일 수가 없다.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주침들을 겪어내고 자신이 놓인 조건을 변형시키고 자기 자신에게 특정한 양식을 부여해가는 과정 자체가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며 광기의 언저리에서 자기 사유를 밀어붙이는 삶을 사는 것은 니체의 특권이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뺨에 자라난 혹이 주는 고통을 스스로 감내할 때 이반 일리치는 더없이 강력한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권리란 항상 다수의 권리다. 무언가를 편안하고 쾌적하게 누리는 것으로서의 권리. 누구나 취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고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는 너무나 의존적이고도 취약한 권리.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힘과 분리된 것일 수밖에 없는 권리. 그런데 이렇게 인간을 누리는 자로, 권리를 면제의 권리로 만들 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삶에 결여를 도입하게 된다. 웬델 베리는 미국이 역사상 최초로 국민 전부가 “일을 회피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말한다. 이때 ‘일’이란 단순히 노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베리가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이 먹는 것, 자신의 사는 곳, 자신이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발휘함으로써가 아니라 상품이나 제도나 기술에 의존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그러한 의존을 자신의 행복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이렇게 자기 삶과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권리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겪어야 하는 모든 불편과 불쾌를 결여로 바라보게 된다.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특권을 열망한다. 가령 한가함이라는 특권을.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사회적 의무나 밥벌이에 규정당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발명하고 상황에 규정당하지 않는 긴장감을 지니기 위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야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요청한다. 이렇게 모두가 동일한, 어떠한 자기 극복과 자기 차이화도 수반하지 않는 추상적 특권을 너무나도 ‘평등하게’ 열망하기 때문에 불평등은 부단히 재생산된다. 내가 갖지 못하고 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원한감정을 유발하는 차별적 특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원한감정은 자기비하나 냉소, 무기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자기 특권을 고수하고 강화하려는 자와 권리의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를 주장하는 자는 사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권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권리 개념의 타락을 문제 삼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실현 불가능한 평등의 이상에 사로잡힌 채 불평등을 부단히 목도하게 되거나 비교 가능한 희소한 권리를 놓고 무한히 경쟁을 벌이는 평균인들로 남게 될 것이다.

권리 개념과 더불어 평등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니체는 ‘평등’과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줄곧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니체의 사유에 새로운 평등 개념이, 그리고 니체 자신에게는 독특한 아나키스트적 면모가 감춰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평등이란 비교불가능한 자기 권리를 실행해가는 자들 사이의 동등함이며 아나키즘이란 외부적 조건에 대한 의존이 주는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환원불가능한 기쁨에 근거하여 자기 행위를 구성해가는 자의 삶의 태도다.

글 : 건화
전체 3

  • 2020-09-21 13:49
    창호 형님의 혼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네요. 여자친구가 돈이 많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많은 순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열등감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타인에 대한 원한을 어찌할 수도 없다는 건 공감됩니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평등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제도를 얘기할 수는 없는지 간질간질하네요.

  • 2020-09-21 17:00
    공정, 평등이란 말을 수시로 외치는 일인으로서 평등을 요구하는 자는 약자라는 말에 찔리는 군요. 반면 강자는 어떤 사회에 살아도 그 사회가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인식할 것 같아요. 그러면 강자는 항상 '특권'을 누리는 자가 되겠군요.

  • 2020-09-29 12:22
    샘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름 깨졌던 개념들이 다시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나의 게으름을 나이로 퉁치는 건지도 모르지만, 몸과 머리가 조금이라도 말랑말랑 할때 공부해야 팍팍 깰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