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4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22 16:07
조회
464
이번 주에는 <도덕의 계보>에 관한 수업을 들었습니다. <도덕의 계보>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마도 다음 주에 다뤄질 것 같습니다. 이번 주 강의 내용은 이전 저작들과 <도덕의 계보>의 관계, <도덕의 계보>라는 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도덕의 계보>의 첫 번째 논문 정도가 주를 이뤘습니다.

-관점과 신체

채운쌤은 <도덕의 계보>가 <선악의 저편>과 세트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도덕의 계보>에는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건드린 문제들 중에서 도덕에 관한 생각들이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덕의 계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선악의 저편>에서 드러난 니체의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죠. <차라투스트라>와 <선악의 저편>에서 나타난 니체의 관점의 중심에는 바로 신체가 놓여 있습니다. 니체가 자아나 이성 같은 정신의 우월성을 전제하는 관념들을 비판하면서 내세우는 사유의 모델은 바로 신체입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은 영혼이나 정신이 아니라 신체 자체라고 말하죠. 우리는 바로 니체가 큰 이성이라고 부르는, 욕망, 이성, 정념, 충동 등이 싸우는 장으로서의 신체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물론 여기서 니체가 신체라고 말하는 것은 정신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마저도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자아입니다.

니체가 관점주의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따라 나옵니다. 니체에게 관점이란 힘의지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관점은 주체가 갖는 상대적인 입장 같은 것이 아니라, 삶 전체와 더불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출현시키는 것이고, 스스로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변이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조건과 더불어서 우리 자신으로 다시 생성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고착되어서, 이전의 표상에 붙들려서 매번의 '새로운 반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철학자와 철학적 노동자를 구분합니다. 철학적 노동자는 진리를 증식시키고 개념들을 모방·재생산하는 자입니다. 그에 비해 철학자는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경유하며 누구도 만들어낸 적 없던 것을 창조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니체의 창조에 대한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의 창조는 다른 것들을 경유함으로써(차라투스트라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자신을 변이시킬 때 가능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은 다른 관점을 경유할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이때 그리고 그러한 창조는 기존의 것을 파괴하되 동시에 그것들을 이용합니다. 철학자의 망치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변이하지 못하는 = 관점을 전환하지 못하는 = 하나의 망상에 고착되어 있는 약자들입니다.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

<도덕의 계보>의 부제는 '하나의 논박서'인데요, 니체가 이 책을 통해 논박하고자 했던 것은 도덕에 대한 보편주의적 관점입니다. 니체는 도덕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촉발한 것이 파울 레의 <도덕 감정의 기원>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니체는 파울 레의 책에 대해서 "이 책만큼 문장 하나하나, 결론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부정할 정도로 그렇게 읽은 책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파울 레가 자신의 책에서 도덕의 가치를 미리 전제하고 그것을 소급하는 방식으로 도덕을 '정초'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니체는 가치를 전제한 채로 기원을 소급해가는 방식이 아니라, 계보학적인 작업을 통해 가치의 가치를 되묻습니다. 그러니까 니체의 방식은 '도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도덕과 정의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겠지요. 니체는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라고 묻습니다. 즉 그의 관심은 지금 주어져 있는 도덕을 정의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것이 탄생하게 된 조건─지금도 작동하고 있을─을 질문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파울 레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했다고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니체의 논박은 그의 논증의 허점이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전제하고 있는 보편타당성, 객관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도덕이 인류에게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공리주의자들에게 '도덕은 없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식의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성을 부정하고 가치평가의 고귀함이나 저열함을 통해 가치를 규정하고자 합니다. 이는 앞에서 얘기한 관점주의에 의한 것이겠죠.

<도덕의 계보>는 3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논문의 제목은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고 두 번째는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이며, 세 번째 논문은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이중 두 번째 논문과 세 번째 논문은 다음 주에 다뤄질 예정이고, 이번 주에는 첫 번째 논문 "좋음과 나쁨, 선과 악"에 관한 수업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귀족(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 선과 악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고귀함과 저열함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객관성, 보편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인 만큼, 그것은 외부적 척도에 의해 관적으로 규정되는 고귀함과 저열함은 아닐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함과 저열함은 힘들의 질과 관련되어 있는데, 들뢰즈는 이를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으로 구분합니다. 그에 따르면 능동적인 힘은 전유하고 전복하고 창조합니다. 이에 반해 반동적인 힘은 열등하고 지배받고, 목적과 가치를 기계적으로 구현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철학자와 철학적 노동자의 구분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힘들이 상대적으로 나뉘거나 위계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니체는 공리주의자들이 전제하는 것과 달리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힘의 질을 외적으로 평가할 어떤 기준이나 상대적 척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저급하고 하찮은 모든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느끼는,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합니다. 이들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힘의지를 감각하는 것에서 창조됩니다.

이들에게 도덕은 비이기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치평가가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구분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약자들에 의한 가치의 전도가 있고 난 후일 것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는 무력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력한자는 고귀한자가 스스로 충만함을 느끼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가치를 창조한 것과 반대로, 강한 자를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긍정합니다. 여기서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로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무력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복수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강자가 그렇게 하듯이 "약함을 강함으로 변환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강한 자를 강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복수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복수와 증오에서 "새로운 사랑"이 자라나는 사태겠지요. 이러한 약자들의 정신적 복수에 의해서 귀족적 도덕이 몰락할 때, 사제적인 도덕이 지배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구성되는 약자의 행복은 안정, 마취, 마비,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능동적인 힘의지의 발현에 대한 혐오가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자의 도덕과 짝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라는 가상입니다. 약자의 증오와 자유의지라는 가상은 항상 함께 작동하는데, 약자는 강자의 폭력이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양들이 늑대가 자신들을 잡아먹지 않을 수 있었는데 잡아먹었다고, 그러니 늑대는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활동과 분리된 활동하는 자라는 망상을 통해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주어진 현실 바깥에 이상 세계를 수립할 때만 가능해지는 망상이겠죠. 지금 존재하는 방식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행위와 분리된 행위자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상대의 악랄함을 증오하는 것은 약자적인 방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대체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와 싸울 때, 어떤 것을 문제제기할 때, 스스로 증오에 의해서 변용되고 있지 않은지, 지금 주어진 것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간식은 양지연쌤, 이응쌤, 규창이가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1

  • 2016-12-23 23:07
    저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인상적이더군요...! 동정을 받으면 받게 되는 순간 자신이 저급한 위치에 있음을 들킬까봐 오히려 동정을 거부한다는 것. (뜨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 또한 자신을 긍정하는 강자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