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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5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2-31 21:30
조회
533
161226 니체 후기

 
  1.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를 도덕을 구분합니다. 주인은 고귀한 인간으로서 자신과 반대되는 인간들을 자신에게 분리시키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거리의 파토스입니다. ‘내가 선하다’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도덕이고, 도덕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고양되고 좋다고 느끼는 것, 힘의 느낌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해석의 의지를 발동하여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 가치의 창조자입니다. 이건 ‘왜 동정하는 행위는 칭찬받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만약 그런 질문을 한다면 자명한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행위의 좋고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되고, ‘결국 동정이 좋은 행위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도덕은 전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입법하는가. 나에게 좋은 것/해로운 것을 떳떳하게 좋다/해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한 사람을 돕지만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출발하지 않는 않습니다.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는 충동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위대한 인물, 그들은 모델을 창안하는 자들이 아니라 어떻게 살지 실험하는 인간들인 것. 니체는 그래서 공감이나 따뜻한 마음을 경멸하거나 경계한다고 합니다. 그건 선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을 존경하는 법을 발명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두 번째 도덕의 유형인 노예의 도덕은 ‘당신들은 나쁘다’에서 출발합니다. 자신들을 불안에 빠트리는 것, 무리의 가치를 위협하는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노예의 도덕입니다. “네가 악하고, 네 탓이다.” 이건 자신의 힘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악을 투사하는 반동적 힘입니다. 주인의 도덕이 자신에게 좋음과 나쁨의 문제라면 노예는 자신을 입법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과 다른 상대를 악으로 만드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선으로 전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취제, 휴식, 평화, 안식 같은 어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상태를 아프지 않는 상태를 행복과 선으로 여깁니다. 이건 행위와 힘을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힘과 행위는 분리할 수 없으며, 내가 행하는 것은 그 힘의 표출이기도 한데, 약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니체는 늑대와 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양은 그런 늑대가 ‘사실 양을 잡아먹지 않을 수 있는데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이런 전도된 의식은 행동하기 위해 자기로부터 입법하지 않고 외부를 필요로 합니다. 원한을 가질 외부를 필요로 하는 도덕. 그래서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원한의 도덕이라고도 합니다. 자신들이 선한 자가 됨으로써가 아니라 강한 자들을 악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말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윤리적 문제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우리 모두 건강해질 것인가. 그것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모두 끌어 모아 완전히 나빠지지도 낫지도 않도록 만드는 성직자들의 문제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병든 자는 건강한 자를 만나서 병이 나아야 하는데 성직자들은 약자들끼리 모여 있게 하여 그들의 목자를 자처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리고 약자들은 자신의 가련함을 신에 의해 선택받은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반동적인 힘은 전염됩니다. 같은 병자는 물론 건강한 사람마저 끌어내리는 원한의 도덕. 그러나 生은 생성되는 모든 것입니다. 생을 긍정한다면 다른 가치를 만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반동의 힘, 다른 가치를 창조해낼 힘이 없기 때문에 가치를 창조하려는 자들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움직임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니체는 “강한 자들을 약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채운썜은 니체가 말하는 긍정의 힘의지를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소수성(들)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성을 긍정하는 것뿐입니다.

 
  1. 부채


 

니체는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탐사합니다. 계보학적 작업이란 우리가 가장 자명한 것의 기원에는 전혀 자명하지 않은 것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양심과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나누어 고찰하는데요. 양심이란 약속과 책임이라는 특권을 획득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인 데 비해, 양심의 가책은 일종의 병이라고 합니다.

계보학적 작업의 기막힌 점은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다름 아닌 부채관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 선한 일과 악한 일, 도덕의 기원이 경제적 기원과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전혀 엉뚱한 기원 속에서 도덕적 문제가 파생된 것입니다. 니체는 이로써 우리 도덕 감정의 허구성을 보여줍니다. 니체에 따르면 문화는 풍습의 도덕의 총체이고 도덕은 원래부터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관습이 새겨진 결과 굳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니첸는 양심의 경우 책임을 특권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건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척도를 따르며 자신에게 떳떳합니다. 위에서 말한 고귀한 인간의 도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구별되는 것은 ‘양심의 가책’ 그것은 원한의 인간이 발명해 냈습니다.

양심의 가책, 죄의식과 부채의식은 어원이 같은 말들입니다. 이는 양심과는 달리 자기 자신이 아닌 채권자에 대한, 외부에 대한 부채의식입니다. 원한의 인간의 특징은 기억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강자는 기억과 망각의 능력을 이용해 스스로를 입법합니다. 반면 약자는 고통이라는 기제를 통해서 기억을 만들고 유지합니다. 모든 문화의 본질을 파헤쳐보면 그 기원에 잔인성이 있다는 사실을 니체는 밝혀냅니다. 문화를 좋은 것이라고 기억하게 만드는 기제는 바로 끔찍한 고문, 희생, 고통인 것입니다. 이런 고통은 사법적인 것이 아닌 순전히 보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네 탓이다’라는 원한의 기억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고 내면화되어 ‘내 탓이다’라고 되돌아온 결과라는 것. 자신에 대한 적대감. 그 반동적인 힘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기막힌 전도가 일어나는가. 니체는 인간이 지루함을 견디느니 차라리 고통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고통을 제거된 상태를 원하는 것이 아니며, 고통을 보고 가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 노예의 방식으로 전도되어 고통은 죄의 결과이자 구원으로 수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자는 늘 악으로 고발된 자가 죄의식을 느끼고 반동적이게 되도록, 그래서 죄를 지었다는 의식 속에서 동등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반동은 전염되고 약자가 역사에서 승자가 되는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입니다.

특정 민족의 선각자인 그리스도가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다는 바울의 해석은 서양의 역사에 양심의 가책을 덧씌우게 됩니다. 니체가 보기에 그런 해석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희생해서 지불한다는 이상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건 채무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의 담지자인 신이, 그러니까 채권자가 채무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살한 형상에 다름 아니니까요. (헉!;;) 이런 기반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발명자는 사실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런 기독교야말로 안티 크리스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희생물로 삼아 역사를 날조하고 부활을 통해 존재의 중심을 피안으로 이동시켰으며 대중을 지배하여 가축화하기 위해 영혼 불멸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상징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들에게 내면의 괴로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각지 않은 나쁜 일이 벌어졌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의 행위를 비판하더라도 그건 신중함뿐이었으며 후회나 죄의식은 아니었다는 것. 그런데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인간에게는 ‘영혼’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니체는 봅니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신중함이 아니라 죄를 통해 행위를 비판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능력을 상실한 채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이라는 병을 앓기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고자 하는 ‘비이기적인 것’이라는 가치. 부정적인 힘의지가 만연하게 된 대지. 그래서 니체는 대지가 이미 오랫동안 정신병원이었다고 탄식합니다. 가치를 생성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을 잃은 인간이 매달리는 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지를 전제로 한 신과의 접촉, 그 외발적인 구원뿐이게 된 것입니다.

,SST|z
전체 1

  • 2017-01-03 00:52
    희생, 인내와 같이 도덕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약자의 반동적인 힘의지였군요. 강자가 강자일 수 있는 능력들을 제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소위 도덕이라 불리는 것들이라면, 평소 가지고 있던 도덕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힘들어 하는 친구를 위로해준다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내가 기꺼이 힘든 일을 맡는 태도가 무엇인지....... 왠지 니체를 보면 뻔뻔해질 것 같아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