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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6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1-03 13:48
조회
382
오늘은 니체의 말기 저작인 <우상과 황혼>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기에는 사실 지난주와 지지난주에 이어서 <도덕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가 채운샘 강의의 주를 이뤘습니다.

1.<도덕의 계보>, 세 번째 논문

<도덕의 계보>는 3개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니체는 그 중 첫 번째 논문에서 원한감정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를, 두 번째 논문에서는 그러한 원한감정이 어떻게 양심의 가책으로 전환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본 3번째 논문에서 니체는 금욕적 이상을 이야기하며 원한감정, 양심의 가책의 힘의지를 문제 삼고, 그것이 어떻게 허무주의와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채운쌤은 반복적으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통해 제기하는 질문이 ‘도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도덕인가?’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여기서 ‘누구’를 묻는 것은 주체가 누구냐를 묻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니체는 철학자와 사제의 금욕을 비교하지만, 그때 중요한 것은 ‘철학자’나 ‘사제’라는 주체가 아니라 각각의 금욕이 나타내고 있는 상이한 힘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에게 금욕은 어떤 다수적(표준적)인 것들, 니체가 소음, 명예, 신문이라고 말하는 것들과 거리를 둔 결과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입니다. 철학자에게 금욕은 그 자체로 덕이 아니며, 그들로 하여금 다수적인 가치들을 다르게 보게 하는 “자발적인 암흑의 상태”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성직자에게 금욕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철학자에게 자연스러운 조건이자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금욕이 성직자에게는 이상이 됩니다. 결과는 비슷해 보여도 거기에 작동하고 있는 힘의지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금욕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것, 이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전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원한감정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건강한 것, 삶을 긍정하는 것에 대한 증오와 원한. 이것은 결국 삶 자체에 대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반박하고 삶 자체를 오류로 간주하는 힘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무기로 삼아 “모든 종류의 덜된 자, 부조화자, 대우를 못 받는 자, 실패자, 괴로워하는 자들”의 목자로 등장합니다.

문제는 무엇보다 힘의지입니다. 니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단순히 성직자라는 계급이나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얼마나 동형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성직자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삶을 부정하는 힘의지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볼 때 금욕주의적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힘의지를 그러한 방식으로 발현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니체에 따르면 증오란 왜곡되고 전도되어 있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쾌감을 얻는 메커니즘입니다. 증오는 증오할 자격이 있는 자신과 증오 당해도 마땅한 증오의 대상 사이에 위계를 수립하고 거기로부터 우월감을 확보하여 그로 인해 왜곡된 쾌감을 얻는 기이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삶에 대한 복수, 모든 생성하는 것과 강한 것, 건강한 것에 대한 복수의 승리에 이르는 때는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채운쌤 강의안)입니다. 병든 자들은 기본적으로 무리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선함을 정당화해줄 증인을 필요로 하고,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든 의사나 간호사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요청되는 이유죠. 이제 삶에 대한 원한에 의한 금욕주의적 이상이 앞서 살펴본 철학자의 금욕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의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성직자와 병든 자의 관계였는데요, 이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사명은 “고통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고통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의 왕국이며, 그의 본능은 그에게 이 지배를 지시하고, 이와 같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가장 특이한 기교, 대가다운 실력, 자기 나름의 행복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직자와 병든 자는 서로를 필요로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직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직자의 지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성직자는 병든 자가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재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원한’이라는 위험한 폭발물을 처리하는 일입니다. 성직자는 외부로 향하게 되면 자칫 무리를 붕괴시킬 수 있는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킵니다. 성직자는 말합니다. “너 자신이 네 스스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성직자는 고통의 원인을 찾는 병든 자들의 심리를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뒤틀어버리는 것이죠. 이렇게 원한감정이 양심의 가책으로 전환되고 나면, 그것이 외부로 향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성직자와 병든 자의 관계는 그 양상을 달리한 채 모든 곳에서 다시 출현한다는 것이 가장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가령 국가와 국민, 자본주의와 소비자, 정신분석가와 환자 등의 관계에서 계속해서 변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동적 힘들은 필연적으로 니힐리즘과 만납니다. 반동적 힘은 모든 능동적 가치들과 현세적 삶을 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동적 힘들의 허무주의는 현실을 가상으로 간주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항상 현실 바깥의 영원불멸하는 것, 어떤 ‘피안’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허무주의’가 모든 가치를 회의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생성 소멸하는 것들 바깥의 영원하고 불멸하는 것으로서의 무無를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 하고자한다.” 니힐리즘과 금욕주의적 이상은 생성하는 것에 대한 부정, 혐오라는 점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에 물든 반동적 기독교신도와 좀비 같은 삶을 사는 부정적 니힐리스트는 동일한 힘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우상의 황혼>, 가상과 실재의 문제

다음으로 채운샘은 <우상의 황혼>에 대해 강의를 하셨는데요,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전개하는 실재와 가상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힘의지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말한 것처럼 <우상의 황혼>은 감각과 이성, 가상과 실재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니체의 말기 저작입니다. 여기서 니체는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깔려있던 생성에 대한 혐오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감각과 이성, 가상과 실재를 위계 짓고 이성과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생성과 존재를 분리시키는 방식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들은 결코 생성 자체를 긍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하면서까지 존재자를 믿”습니다. 이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전제하는 존재자, 생성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의 불변하는 존재자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들은 존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논리와 형이상학적 논의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그리고 니체가 비판하는 것이 바로 감각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 감각 기능, 보통의 경우에도 지극히 비도덕적인 이것이 실재 세계의 모습을 우리에게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존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 감각을 비난하고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감각 바깥에 실재를 위치시킵니다. 니체는 이러한 철학자들을 “미라”, “무덤 파는 자” 등의 말로 비판합니다.

흔히 니체를 긍정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때의 ‘긍정’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긍정적’이라는 말과는 무관합니다. 니체의 긍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성에 대한 긍정입니다. 니체는 생성 바깥에 존재를 두는 철학자들의 방식이 탈역사적이라는 점에서 비판합니다. 존재 바깥의 존재자를 상정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 안에서 우발성은 사라지고 세계는 이미 주어진 것이 되겠죠. 그러한 관점에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를 비판하며 참된 세계라는 우상의 역사를 씁니다.

우선 그리스적인 참된세계가 있습니다.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그리스적인 정신은 참된세계를 상정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와 경건한 자, 덕 있는 자는 그러한 참된 세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철학자 자신이 진리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플라톤이 진리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참된 세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참된세계를 ‘약속’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참된세계를 내세에 관한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유예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칸트적인 참된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와서 참된세계는 결코 이를 수 없고 증명도 약속도 불가능한 것으로 출현합니다. 그저 요청되는 것으로서의 참된 세계, 물자체가 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실증주의가 도래하는데, 이제 경험되지 않는 것은 부정됩니다. 실증주의는 자신의 경험을 실체화함으로써 경험 바깥의 참된세계를 부정합니다. 다음으로 니체는 참된세계가 완전히 부정당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쓸모없는 관념을 없애버리자고 말합니다. 참된세계에 대한 가상의 승리.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니체는 가상만이 남은 세계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참된 세계라는 오류는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의 세계도 없애버릴 때에 끝납니다. 참된 세계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경험 세계를 실체화시킨다면 그것은 다른 방식의 본질주의에 지나지 않겠죠. 또한 모든 것은 가상이라는 상대주의적인 관점 역시 니체에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니체는 사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니라, ‘신은 존재한 적도 없다’라고 말하려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참됨-가상이라는 구분 자체가 없어질 때, 거기에는 해석들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들의 세계를 참됨-가상의 구도를 가지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니체는 이성/감각, 진리/오류, 실재/가상 등의 틀 자체를 떠나서 그 해석에 들어가 있는 힘의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세계에는 해석에 따라서 세계 자체를 출현시키는 상이한 힘의지들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 속에 들어가 있는 힘의지를 본다는 것, 그것을 평가한다는 것은 인식의 차원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맞다/틀리다, 진리/오류라는 틀 자체를 떠나서 완전히 새롭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만 어떤 힘의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힘의지를 평가한다는 것은 다른 해석의지를 작동시킨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세계를 다르게 출현시키는 문제이기도 하겠죠. 그런 점에서 힘의지를 본다는 것은 척도에 따라서 무엇을 판단하고, 바깥에서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채운쌤은 니체에게 윤리란 힘의지를 발현하는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문제라고. 이렇게 말하면 항상 뻔한 질문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느냐고. 이러한 질문은 도덕률을 이미 전제하고 제기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도덕률에 의한 선행과 동정이 오히려 병을 전염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능동적 힘의지를 발현시킬 것인가, 어떻게 다른 해석을 통해 다른 세계를 출현시키고 다른 주체가 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이때의 다른 존재란 어떤 모델이나 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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