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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정의 관찰일지] 꿋꿋한 규창이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8-09 18:41
조회
319
[사오정의 관찰 일지] 꿋꿋한 규창

요즘 나는 연구실에서 ‘사오정’으로 불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해 늘 ‘뭐라고?’란 말을 달고 산다. 또 잘 삐진다(나이는 마흔이다). 이 두 가지가 별개인 거 같지만 사실 시선이 나로만 향하는 하나의 문제이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다른 사람 말은 내 식대로 해석해서 듣는다. 그래서 나이 값을 하기 위한 ‘소소한’ 훈련으로 ‘규문 사람들 관찰기’를 쓰기로 했다.
이 글이 그 첫 시도다. 이 시도에서 나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자주 쓰는 말, 표정, 행동, 좋아하는 것 등을 중심으로 그들의 특징을 살려 써보려고 한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연구실 <규문 톡톡>의 일정에 맞춰서 그 주의 연재자를 관찰해 매주 금요일에 올리기로 했다. 첫 관찰 대상은 <서당개 삼백년>을 쓰고 있는 규창이다.

#꿋꿋한 규창이 1

밥을 먹고 뒷정리를 하다보면 볼을 우물거리며 여전히 먹고 있는 규창이가 보인다. 두 손엔 비빔밥 양푼이나 라면 냄비 혹은 반찬이 담긴 접시 따위를 들고 있다. 맛이 있든 없든 군말 없이 남은 반찬을 해결하는 건 언제나 규창이다. 볶음밥이나 반찬이 남으면 사람들이 한 숟갈씩 뜨고 규창이 앞으로 슬쩍 밀어주기도 하고, 사람들이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때면 규창이가 스스로 접시를 당겨 먹기도 한다. 꽤 많은 양이 남아도 꿋꿋하게 그릇을 싹싹 비우는 규창이를 보며 혹자는 음식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무감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트레이너 규’의 어마어마한 운동량을 떠올려본다. 밥 한 공기로는 금방 배가 고파서 기꺼이 먹는 게 아닐까? 암튼 규창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군것질보다는 집밥, 커피보다는 차, 약보다는 소금이나 마늘 등의 건강식과 보양식을 꿋꿋하게 먹는다.



 

#꿋꿋한 규창이 2

우리 연구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공간의 한 쪽 벽은 슬라이딩 도어로 되어 있다. 그것을 펴면 10~30명을 수용하는 넓은 강의실과 세미나실로 나누는 가벽이 된다. 열어두면 시야가 훤하지만 그렇게 되면 작은 에어컨으로는 도저히 시원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원함도 확보하고 강의실을 오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게 도어를 3분의 2정도만 닫고 입구쪽은 느슨하게 열어두고 밥을 먹는다.
찜통더위가 시작되는 어느날 점심시간이었다. 중국어 수업이 끝난 금요일 오후, 다른 수업이 없어서 늘 있던 사람 외 특별히 올 사람은 없었다. 날이 더우니 슬라이딩 도어의 입구만 열고 에어컨을 틀어 두었는데, 갑자기 규창이가 문을 차곡차곡 끝까지 접었다. 나는 시원하게 하려고 벽을 닫아둔 거라 말했다. 그러자 규창이는
“그러면 사람들 오가는 걸 볼 수 없잖아요.”라고 했다.
규창이는 중간이 없는 걸까?

#꿋꿋한 규창이 3

오늘 새벽 규창이가 <규문 톡톡>에 맹자의 자포자기를 주제로 쓴 글을 올렸다. 규창이는 글 쓸 때도 흑화하거나 슬픔의 정서에 빠지거나 식사량이 급격한 변동을 보이는 등의 눈에 확 뜨이는 변화는 없다. 어제는 연재팀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자주 보일 뿐이었다. 규창이가 “노답 인생을 살아 본 경험이 있냐.”, “공부의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침착하게 묻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자기 경험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사돈의 팔촌 이야기부터 뉴스 기사든 뭐든 이야기 했다. 길게 찢어진 규창이의 눈꺼풀이 꿈뻑꿈뻑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야기가 늘어지려 하면 알맞은 순간 마무리하고 글쓰기에 집중하는데, 그 태도는 언제나처럼 단호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글쓰기 팀인 한역, 지현샘과 ‘정부장’ 건화의 도움을 받으며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수정하는 사이 자정이 훌쩍 넘었다. 8월 9일 새벽, 오랜 산고 끝에(?) 글이 업로드 됐다. 규창이는 잠시 기뻐하는 듯 싶더니 물을 마시고 ‘소생’팀의 여행기 쓰기 진행상황을 살핀 뒤,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여행기를 쓰려는 거다. 규창이의 모니터를 보니 글이 한 줄밖에 없었다. 인트로부터 다시 쓰는 참인 것 같았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졸리다 한 마디씩 할 법 한데 그냥 묵묵히 쓰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자러 갔다.



# 꿋꿋한 규창이 4

입추가 막 지나고 열기가 한 풀 꺾인(그래도 최고 기온 35도) 오늘 점심시간의 일이다. 정옥샘이 “오늘 집을 나오는데 바람이 확실히 시원 하더라~”라고 하셨다. 어젯밤 나는 ‘소생 여행기’를 쓰는 합숙으로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앞으로 오후 5시까지 두 가지 미션이 있다. ‘규창이 관찰기’를 마감하고 소생기 미팅이 있는 것이다. 그 ‘미션들’ 생각을 하자, 문득 “나도 바람 쐬고 싶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데, 규창이 왈 “바람 쐬면 되잖아요.”
너도 이미 너의 생각이 있구나.

전체 3

  • 2019-08-09 18:48
    첫 타자가 되어 영광입니다. 뭔가 많이 미화가 된 것 같습니다만.... ㅋㅋㅋ 다음 사람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겠습니다.

  • 2019-08-09 18:48
    "볼을 우물거리며 여전히 먹고 있는 규창이가 보인다." 꿋꿋함 1
    "갑자기 규창이가 문을 차곡차곡 끝까지 접었다." 꿋꿋함 2
    이미 생각이 있음 꿋꿋함 3
    꿋꿋한 규창이 형님의 모습 새롭게 발견하고 갑니다~

  • 2019-08-14 16:36
    사오정이 그린 규창의 '꿋꿋함'이 규창의 매력포인트지요! 누가 뭐래도 끝까지 간다!!는 그 지점을 잘 보여주는 사오정님의 예리한(?) 관찰에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