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1.13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1-09 14:20
조회
630
지난 시간에는 3장 사유의 이미지 함께 읽었습니다.
다음주는4장 전체 함께 읽을 텐데, 보셨는지 모르지만 분량이 꽤 많습니다.
하루 전에 읽다가는 큰일 나고, 읽기 않고 수업 오셨다가도 낭패 보실 게 분명하니, 모두들 조곰씩조곰씩 읽어두셔요.

간식은 막차도 아니고 중간에 탑승하신 안명애쌤+윤희연쌤께 부탁드려요 ^_^

'사유의 이미지'라는 말은 참 애매한 표현인데, 채운샘께서는 상 없는 사유라 하셨네요.
이와 반대로 수많은 상들을 가진 채 출발하는, 자신이 가진 상을 다시 물을 생각이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채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 있다고 하죠. (니체는 이 모든 철학을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채 사심 없이 참된 것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 철학들은 모두 선-철학적 이미지 위에서 오직 동일한 것을 반복할 뿐이랍니다.
코기토는 건재하고, 인간은 여전히 상식과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철학은 존재하는 참된 것을 향한 이성의 모험이 되지요.
이것이 3장에서 들뢰즈가 비판하는 독단 철학(=동일성의 철학, 재현의 철학)의 모습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하찮은 사유가 아니라 아예 사유가 아닌 것으로 치부합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유를,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길을 내가 원치 않은 순간에 떠나야 하는 '사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결말이 보장된 모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의 습관적 삶을 파열시키는 사건이자, 그런 사건 앞에서 주체가 스스로를 열어젖히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를 '기호 해독'이라 설명하기도 하죠.
사유는 규정되지 않은 채 꿈틀대는 기호들과의 마주침이고, 그 마주침에 의해 돌연변이를 분만하는 일이랍니다.
가령 <차이와 반복>과 내가 만났을 때, 이전의 내 사고를 답습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들뢰즈의 철학을 도그마화 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방식으로 내가 책을 읽고 물음을 생산해낼때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사유하기의 시작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사유는 선재하는 의미를 찾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오히려 은연중에 품고 있던 전제들을 발견하고 부수는 일에 보다 가깝습니다.

헌데 어째서 사유의 시작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가?
토론 시간에도 나온 이야기이고, 수업 중에 현옥쌤도 질문하셨는데요. 이를 사유-사건에 대한 위의 설명이 대신하는 듯합니다.
사유-사건은 언제 발생하는가? 내 의도와 내 기대, 내 기존의 판단과 앎의 체계들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내가 기대한 바대로 흘러가는 국면에서는 사유-사건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나의 기존 판단과 예측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일종의 앎을 확립하는 데 바쳐지겠지요.
하지만 내 발로 들어갔으나 예측과 너무도 다른 상황이 펼쳐질 때, 혹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어떤일이 닥쳤을 때, 그때 인식능력들은 교란되고 맙니다.
이건가 저건가, 이건 예전의 이것과 비슷한가좀 다른가... 이런 질문이 아무 소용 없어지고  내 앎의 어디에서도 준거점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들뢰즈는 바로 이 순간을 '불법침입', 바깥이 내게 쏟아져들어와 '있던 나'를 할퀴고 부수는 사건이라 여깁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유의 가능성은 바깥으로부터 옵니다. 사유를 부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밖입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도 사유하는 삶과 먼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누구는 평생 여행 한 번 안 가고 자기 서재를 지키는데수시로 사유-사건을 경험하고, 누구는 도무지 한 곳을 지키지 못하고 종횡무진 세상을 누비며 온갖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이야기를 보고 듣는데도 떠나기 전의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요.
바로 여기입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일어난 마주침에 대해 어떤 태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정말 사건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오이디푸스는 점점 명확해지는 진실을 덮어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진실에 대해 변명하거나 도망가려고도 하지 않았죠.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잔을 앞에 두고도 탈옥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라스콜리니코프도 끝내 광장에 나가고 스스로 유형지로 향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 중 누구도 사건 모두를 의도하거나 혹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그러니 외부적 사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다는 것 - 바로 이 사실을 저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채운쌤 표현대로 그것은 '마주침에 대한 열림'입니다.
누구나 한 생애 동안 수많은 것들과 마주치지만 누구는 그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누구는 그것을 봉합하고, 누구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기 바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대한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그 사건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그가 무엇을 묻는가에 따라 그것은 위대한 사건이 되기도 하고 사소한 에피소드가 되기도 하겠지요.
가령  법회에서 문수보살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대중 사이에서 오직 선재동자에게만 지금의 상황이 사건이 된 것처럼요.
이는 오직 선재만이 이 마주침을 사건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유란 곧 진정한 반복입니다. 매번의 이질적인 마주침 앞에서 문제의 장을 구성하는 삶, 이것이 시간의 세번째 종합이고, 영원회귀입니다.
그러므로 사유란 머리가 아니라 차라리 무의식들 사이의 격전과 배움의과정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사유는 신체적 활동이고 삶의 문제입니다.
전체 3

  • 2016-01-09 22:39
    오옷, 이 감동적인 느낌은 뭔지요. 사유란 진정한 반복이고~~~~또 영원회귀라는 거요. 저도 들뢰즈와의 마주침을 사건화하는 선재동자가 되고야 말겠다고~~~~^^

    • 2016-01-10 20:23
      혹시... 동사서독 반장하시는 그분? 루쉰 에세이 못쓰시고 외유 나가시는 그 '뽀이'?? ㅋㅋ

    • 2016-01-11 09:56
      누굴까 궁금했는데 그러하군뇨... 들뢰즈뽀이... 근데 채운쌤 어조가 왠지 앞에 뽀이님 말씀을 다 뒤집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