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동물우화 세미나 5주차 후기(민호팀)

작성자
hilde
작성일
2018-08-21 22:58
조회
110
최근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화두가 생겼다. ‘우연한 마주침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스피노자를 공부하기 전에는 이런 질문은 생소하기조차 했다. 어떤 사건이 생기면 그저 힘들고 회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일이 왜 나한테 생겼는지 투덜거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 왜 나한테만 생기는 거야 하면서.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 사실을 이해하니 어떤 사건을 전체적인 시야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화와 짜증이 덜 생기는 것 같다.

지난주에는 적합・부적합한 관념, 능・수동의 문제, 이성과 정서 그리고 이성과 욕망의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배웠다. 그러니 이해한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적합부적합한 관념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우발적 마주침을 겪게 된다. 그런 마주침에서 우리는 신체의 변용을 통해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한 사례를 살펴보면서 부적합・적합한 관념에 대해 정리를 하고자 한다.

내 주변에 항상 아픈 사람(A)이 있다. A의 병은 자주 바뀐다. 간질이 있어서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간질이 좀 잠잠해지면 자주 체한다. 체기가 가시면 어지럼증이 있다고 호소한다. 참~ A를 이해하는 것이 수월치 않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짜증이 난다. 어떨 때는 ‘진짜 아픈 거 맞나? 꾀병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A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만으론 나는 A의 상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 있다. 내가 보기엔 ‘일하고 싶지 않아서 아프다고 하는 거’ 같다. A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A를 편견과 단편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인가? 나는 A가 아프다고 호소를 자주 하기에 단지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하기 싫으니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닌지 의심을 한다. 그리고 A의 다른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A를 더 이상 내 근처에 없도록 내치고 싶어 한다. 이런 것이 내가 이해한 부적합한 관념이다. 다시 말해, 아픈 사람의 증상을 ‘게으른 사람’으로 간주하거나 나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편적 시야를 의미한다.

하지만 A의 성장과정과 최근 몇 년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그런 질병들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A를 다각적 측면에서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을 끌어안고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록 힘들게 할지라도 때로는 이런 일도 겪어내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적합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2) 능동과 수동의 문제

여기서도 앞의 사례를 갖고 능동과 수동의 문제를 다뤄보자. A와의 관계에서 내가 부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면 나는 슬퍼진다. A는 나를 오로지 힘들게 하는 외부 원인이 된다. 그러면 난 A가 보고 싶지 않고 어쩌다 A를 보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계속 보기 싫다는 정서에 예속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동이다. 수동이란 이렇게 외부적 원인으로 나의 정서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능동은 내가 겪은 것을 외부 원인 때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 입각해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생긴다. 본성에 입각한다는 것은 내가 자연 안에 있는 존재이므로 A와 관련된 사건을 겪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법칙의 전체적 측면에서 사유하는 것이 적합한 관념이자 능동이다. 우리의 본성에 입각해서 어떤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정서적 예속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사건을 겪는 것 자체는 수동이지만 이것을 어떻게 전체적인 이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게 능동이다. 겪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이해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능동인 것이다.

3) 이성과 정서, 이성과 욕망의 문제

기존 철학에서는 욕망과 이성은 반비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욕망이 강하면 이성은 약하고, 이성이 강하면 욕망이 약하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성과 욕망, 이성과 정서가 반비례한다고 보지 않았다. 신체와 정신이 비례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 작동 안에서 욕망과 이성이 비례적이다.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정서의 메커니즘을 이해해서 자신의 욕망과 정서에 끌려가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을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는 자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욕망은 곧 ‘코나투스’다.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의 존재를 지키려는 힘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관념, 신체 활동)은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신체 단련이 필요하다. 신체성을 다르게 배치하면 이성의 힘도 커진다. 단련한 자의 욕망은 정서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성적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정서가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다. 욕망이 전개되는 방식, 작동되는 규칙을 이해해서 수동적인 욕망에 갇히지 않고 욕망 자체가 능동적 기쁨이 되도록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서 자체가 우리의 역량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서는 그것 자체가 이미 신체의 변용이면서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누군가 날 욕하더라도 그 사람 앞에서 동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증오가 생기지 않으면서 오히려 상대에 대해 가슴 아파하면 그것이 자비이다. 그리고 강한 자이다. 이렇게 정서는 역량의 표현이다. 내가 어떤 정서를 갖고 있느냐가 역량의 표현이다. 정서는 기질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 윤리적 문제이자 신체적 문제(역량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성과 정서, 이성과 욕망의 문제는 이렇게 이해된다. 이성과 정서와 욕망의 문제는 함께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념에 예속되지 않는 이성적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정서와 욕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외부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기쁨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서는 역량의 증감에도 관련이 있다. 기쁨은 사건을 더 많이 이해한 것이며, 슬픔은 단편적 이해로 역량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래서 영혼의 동요를 일으킨다.

우리는 어떻게 영혼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능동적 기쁨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전체의 연관 관계속에서 마주침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가능할 것이다.
전체 3

  • 2018-08-23 23:30
    A님은 현주샘의 공부를 아주 가까이서 실험할 수 있게 해주시는군요!
    '정서와 욕망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코나투스의 자기를 지키려는 힘, 신체성을 다르게 배치 이런 부분들이 어떻게 정서와 욕망의 메커니즘과 관계되고, 그것이 또 어떻게 기쁨으로 이행시키는지 더 설명을 듣고 싶네요~
    그럼 토요일 마지막 수업에서 보겠습니다!
    후기감사합니다~

  • 2018-08-24 11:39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내가 어떤 정서를 발생시키는지가 바로 역량의 표현임을 후기로 보여주시는군요. 시원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

  • 2018-08-24 14:42
    주로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는 위로와 공감도 '정서에 예속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거겠죠? 지나가다 후기가 재미있어서 한 마디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