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동물우화 세미나 4주차 후기(지은팀)

작성자
윤연주
작성일
2018-08-21 23:11
조회
156
1) 이해, 적합한 관념의 형성

스피노자 철학이 이전 형이상학 철학에 대해 혁명적인 부분은 신체와 정신을 동시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이 신체작용과 연관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념은 외물과의 마주침을 통한 합성 또는 분해의 과정(신체의 변용)에서 생성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떤 관념도 신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정신과 신체성, 2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먹자’는 정신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을 먹기로 했어’라는 결단이지만, 연장의 차원에서 보면 규정됨(끌리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렇게 신체와 정신은 동시적입니다.

브뤼당의 당나귀는 자유의지의 딜레마(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것이 동일한 강도로 공존하는 상태)를 표현하는데, 이것은 설정 자체가 관념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이런 식의 가 관념적 동요를 영원히 겪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A라는 것을, B라는 조건에 대비하여 선택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우리의 몸이 A를 더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A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A가 결과적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결단한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와 아내가 물에 동시에 빠진 상황에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할 때, 이는 아내라는 선택지를 버리고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신체와 무관한 자유의지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스피노자도 젊었을 때 참된 선을 추구하는 삶과 통상적인 선(돈, 성욕 등)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런 질문에는 참된 선과 통상적인 선이 실체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가정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통상적인 선을 추구하는 삶의 안락함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상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나중에는 기쁨을 누릴지도 몰라도 추구하는 과정 자체는 기쁨일 수 없습니다. 목적이 설정되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목적이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피폐해 집니다.

삶의 조건을 이해한(세상을 해석한) 상태에서는,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닌 영원한 기쁨을 주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불어에서 이해는 comprendre로 여기서 com은 ‘함께’라는 뜻이며, prendre는 ‘잡다, 쥐다, 취하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해한다고 말할 때, 단편적인 부분만을 보고 이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다하며 선형적인 인과 관계를 갖다 붙입니다. 이해는 단편적인 질서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더 많은 관계 질서 속에서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의 일은 comprendre를 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상식의 세계에서 자기 경험에 준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 딛고 있는 전제를 근원에서부터 뒤집어 생각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드러나지 않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 것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상식, 편협한 전제, 습관화된 생각의 틀에서 연유하는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야, 즉 이해해야 이해한 것만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본성/본질을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양태는 신의 역량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은 자연이므로, 모든 존재는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 안에 있는 법칙인 생, 노, 병, 사의 법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개념은 인간에 대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인간에 대해서도 별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럼 자연 안에 있는 것 중에서 A와 B를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A와 B는 신체를 관통하고 있는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이라는 변이의 역량에 의해 구분됩니다. 어떤 것도 본질적 규정은 없습니다. 역량을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본질이 결정됩니다.

2) 능동과 수동

우발적인 마주침 속에서 다수적으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면, 사건 자체는 나에게 불행일 줄 모르지만, 그냥 나쁜 것이라고 규정되지 않습니다. 겪는 것을 가지고 바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과거와 유사한 사건을 겪을 때 지혜가 됩니다.

사건은 겪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입니다. 우리 밖의 무언가를 원인으로 삼으며, 사건을 겪는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수동적입니다. 우리의 본성에 준거해서, 즉 우리가 자연 안에 있음에 입각해서 사건을 해석하면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 안에 있는 존재라서 겪는 것을 이해하는 것, 예를 들면 만들어졌기 때문에 허물어지고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잃는 것임을 동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건을 이해하고 정서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부에 원인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즉 능동적일 때 우리는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동적과 능동적은 사건에 얽매이느냐 이해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욕망, Conatus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연 안에 있듯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자기를 지켜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Contatus는 니체의 힘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른 것에 의해서 침해를 받지 않는 한 자기 존재를 이어가면서 유지하려고 합니다. 생명 자체의 본질은 능동적입니다. 생명이 소멸하는 것은 존재가 다른 것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 생명 자체의 본질은 능동적입니다. 욕망은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여합니다.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텍스트를 여러 번 읽으려 하듯이 신체도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필사를 하게 되면, 작가의 사유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쓴다는 것 자체가 신체의 힘을 강하게 동원하는 일이며 쓰는 과정에서 관념을 확인하고 애매하게 맴도는 것들이 명료하게 정리됩니다. 쓰기를 통해 어휘와 사유의 역량이 같이 증가하게 됩니다.

3) 이성과 정서는 비례한다

욕망은 정신과 신체에 함께 관여합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동시에 표현됩니다. 이전에는 욕망을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 욕망과 정신(이성)을 반비례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성과 욕망, 욕망과 정서가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욕망이 강해서 이성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작동 안에서 이성과 욕망이 같이 간다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은 욕망과 정서의 발생 매카니즘을 이해해서 욕망의 수동적 예속 상태에 갇히지 않습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런 신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관계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배하며,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능동적으로 기쁨을 모색하는 길을 추구합니다. 비폭력 운동을 두려움, 공포, 슬픔의 감정으로 한다면, 증오와 원망이 생길 것입니다.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역량이 작은 것입니다, 총부리를 겨누는 자 앞에 있어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마음의 고요 속에서 행하는 것이 역량입니다. 정서 자체가 신체의 변용이며, 변용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미움을 내지 않는 것,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정서가 역량입니다

정서가 역량의 표현이면, 마음이 동요하는 것은 역량이 가장 작은 것입니다. 정서를 역량의 증감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기쁨은 능동적임을 의미하며 사건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동반되는 정서입니다. 슬픔은 수동적임을 뜻하며 사건을 단편적으로 이해할 때 발생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정서를 기질적, 심리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윤리적인 문제로 간주합니다. 어떤 정서를 어떻게 생산해 내느냐의 윤리적 문제로 환원시킵니다. 정서는 신체적 문제, 역량의 표현입니다.

악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억지로 선을 추구하는 것, 악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은 노예입니다.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상벌과 상관없고 나의 역량뿐만 아니라 타인의 역량도 크게 하므로 행위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은 가치를 생산하며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며, 역량이 큰 자는 고독 속에서 혼자 역량을 크게 할 수 없습니다. 힘이 마주쳐서, 타인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 속에서 역량은 커집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개체의 역량이 커지는 것은 사회의 역량도 커지는 문제로 보았습니다.
전체 3

  • 2018-08-23 23:55
    지난 수업의 핵심+디테일이 탄탄하게 다져진듯한 후기네요~(시간들여 꼼꼼히 정리하신것 같은 냄새가...)
    머리속에 정리가 쏙쏙되요!
    어떤 정서를 어떻게 형성해 내는가, 어떻게 공동체의 역량이 커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윤리적 문제로 이어지는 부분이 더 명료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장자 시간부터 아리송하던 스피노자의 베일을 하나씩 함께 벗겨가고 (??) 있습니다!!
    스피노자와의 여름은 드디어 마지막이군요~ 토요일날 뵙겠습니다~

  • 2018-08-24 11:56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은 '욕망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는 말이 좀 걸렸어요. 이성과 욕망이 함께 가는 것이라면 욕망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욕망을 갖게 된 상태가 아닐까요? 나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 앞에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는 건 더 많은 영향관계 속에서 이해했기에 분노라는 욕망에서 자비라는 욕망으로 전환된 상태라고 이해되었거든요. 모든 존재는 자신을 지켜가려는 속성(코나투스)를 지니니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란 불가능하고,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가 중요하단 생각이 듭니다요.

    • 2018-08-24 15:23
      지은샘 말이 맞아요.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통상적인 선에 대한 욕망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는데,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네요. 지은샘 말처럼 욕망이 전환된 상태이지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