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스피노자 5주차 후기_민호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8-09-01 18:48
조회
128
<스피노자와 함께 여름을> 5주차 강좌 후기 입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에 대한 전제 자체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문제라고 여겼던 것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대해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스피노자의 개념을 배우면서 이 전제가 정서를 예속시키는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빈번하게 정서에 예속되면서도 정서를 이성으로 누르려고만 했지, 정서가 발생되는 메커니즘을 이성적으로 풀어 보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성의 영역 밖에 있다고 여겼던 정서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냅니다.

스피노자는 외부 조건에 방해를 받지 않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스피노자가 볼 때 주어진 조건과 관계를 부정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서 또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정서가 발생·소멸합니다. 그래서 정서의 문제는 결국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윤리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강의시간에는 스피노자의 ‘상상, 정서모방, 신을 향한 사랑, 국가’에 대한 개념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 정서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스피노자가 정서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국가는 어떤 것인지를 중심으로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정서가 일어난 상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예속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의 인식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또 다른 정서를 상상해 내야 합니다. 상상을 통해 정서가 예속되는 것이 멈추고 다른 이해의 차원으로 전환됩니다. 상상은 유한하고 고정된 사유에서 무한하고 유동적인 사유로 넘어가는 힘입니다.

상황을 다르게 보는 단계까지는 상상의 힘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예속에서 벗어나서 평정심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성의 역량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이란 개념으로 스피노자는 설명합니다. 신을 향한 사랑은 신비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처럼 사유한다는 것이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신처럼 사유하는 사람은 고정되고 얽매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과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신'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내 옆 사람 또한 '신'임을 아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때 삶을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는 삶을 상상하는 부정에 의한 긍정이 아니라 아픔까지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긍정 자체입니다. 지성의 역량은  고통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고통을 다르게 사유함으로써 지성의 역량은 증대됩니다.아픈 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역량 = 국가의 역량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서란 인간 주체에 귀속되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타자를 매개로 해서 정서가 증폭되거나 감소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서를 일으키는 상황을 겪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서는 비자발적이며 모방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서 정서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서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피노자에게 어떻게 함께 살까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서’라는 개념은 중요합니다. 국가에 대해 스피노자와 대립적인 입장을 가진 홉스는 국가를 이성으로 무장한 연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홉스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추구하는 것은 원시적 사회이고, 인간이 이성의 상태에 돌입했을 때 국가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전제라면 인간은 합리적인 것만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회 속에서 '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욕망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정서와 이성, 두 속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에 대한 정의도 달라집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국가란 정서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리더는 개체를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더 큰 역량으로 개체들을 압도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리더가 자신의 역량보다 클 때 마음으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역량이 더 완전한 리더'를 원하는 이유는 '더 큰 역량을 지닌 사람의 정서'를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역량 또한 증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이유는 이성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정서 모방을 통한 개인의 역량이 증대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역량은 곧 국가의 역량이 됩니다.

스피노자를 알고 난 후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역량이 커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정서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지, 전체성 속에서 변이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년에 스피노자 종일반이 개설된다고 합니다! 스피노자와 또 다른 만남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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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3 18:25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마찬가지로 홀로 움직이는 자유의지 또한 없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성만이 작동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정서를 형성하고 거기에 예속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스피노자의 부단한 노력을 아주 일부 맛볼 수 있는 바캉스였습니다.

    그럼 내년의 스피노자와의 진한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