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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후기

작성자
강석
작성일
2017-11-08 11:00
조회
131
 

암송은 항상 머리가 새하해지는 경험이다. 구전(口傳) 문화가 단절된 후의 현상, 어쩔 수 없는 아픔이다. 기억과 앎이 글자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생백(生白)”의 경험을 기약해 본다. 토론시간은 ‘지뢰’와 ‘인뢰’이다. 열띰과 웃음, 수다와 거침에서 간혹 콕 찌르는 순간이 마주치기도 한다. 그 마주함은 온전히 자신만의 읽기와 오독 끝에 다다른 각득기의(各得其宜)일 것이다.

오늘은 묘하게 두 반에서 따로 놀았음에도 “마음”, “감정”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선생님의 이 한마디가 찔린다. “마음이 감정이냐?”

 

1. 다르게 질문하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 있는 이상 끊임없이 거기에서 겪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을 때 다음 번에 열심히 해야지 하거나 다음에는 문제를 만들지 말아야지 하는 식은 공부의 힘이 아니다.

“그냥 열심히 해야 하지” “다음 번에 열심히 해야 하지” 이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왜 또 여기에 있지, 왜 똑 같이 겪고 있지. 정신 차리고 보면 왜 계속 거기이지가 문제이다. 다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이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 다르게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공부가 일상이라는 말은 자신이 겪는 삶속에서 공부를 갖고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러지 않으면 공부가 관념적이 되고 만다.

 

장자가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게 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2. 감정이 습관성이라고?

 

감정 이야기를 할 때 왜 실감이 안 되지, 감정이란 이것일까. 저것일까. 감정을 내 바깥에 두고 얘기 하고 있는 느낌이다. 감정을 자기 문제로 갖고 온다면. “우리는 감정에 왜 휘둘리지?”

감정이 없을 순 없다. 덕충부에서 “감정이 없다.”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외물과의 마주침 속에 있다, 어떤 것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마음이 동할 이유가 없다. 음식만 먹어도 동해진다.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거나 등등 그런데 인간은 동물, 식물보다 같은 유(類) 인간에게서 동한 것이 훨씬 크다. 혼자서 산다면 문제가 안 된다. 산다는 것 자체가 무엇과 마주침 속에 계속 동하는 것이다. 거울이다. 뭐가 와야 동하지.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 나이다. 감정은 습득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희노애락애오욕에 애들이 휩쓸리나. 느끼나. 얘들이 슬픔이란 감정을 갖고 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울고 찡찡거리는 것은 우리와 다른 지평에서 벌어지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힘에 대한 순연한 반응 같은 것이다.

감정이란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입력되었을 때 표출되는 것이다. 감정이 ‘습득’된다. 감정은 “습관적”이다. 음악, 그림, 영화 ... 공감하지 않더라도. 감정적인 습관이 있기 때문에 어이없게 눈물이 난다. 영화 ‘칠 번 방’ 되게 어이없지 않는가? 누가 죽었다고 하면 눈물이 난다. 애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습관성이 없다. 바로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우나 노무현 대통령 손녀, 자전거 타고 ... 그것이 얘다. 얘는 감정을 모른다. 우리의 감정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감정이 외물과의 마주침에서 습관적이다.

 

3. 감정에 휘둘린 이유는?

 

질문에 대한 포인트는 감정에 왜 휘둘리지, 감정조절이 안 되는 것은 왜일까? 감정에 동요할까.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 이다. 니체,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 욕망, 충동, 본능, 지성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한꺼번에 작용한다고 한다. 감정, 욕망을 지성이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감정은 지성이 그 감정에 동조하는 것이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은 지성 같은 것은 없다. 슬픔을 표출할 때, 슬픔을 지성이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에 반하는 이성과 의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스피노자, 니체에게서 배우는 철학이다.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신체가 동시에 작동한다.

어떤 때 감정에 휩쓸리는가? 지성이 그 감정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하는 정도로 밖에 작동하지 못할 때이다. 슬프다. 그런데 왜 비난하지. 더 슬프다. 지성이 제는 나빠. 너는 한다고 했는데 너를 비난해 그러니 제는 나빠. 이런 식으로 지성이 정리해주고 있다. 이와 달리 지성이 작동할 수도 있다. 네가 할 것을 했는데, 왜 저 사람을 나쁘다고 비난하고 있니. 너에게 드러난 감정에 너를 동일시하지 않니. 지성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인간이 감정에 계속 머물지 않게 된다.

감정적인 인간, 감정이 풍부하다고, 감정이 풍부한 것은 지성이 미약한 것이다. 감정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기쁨, 슬픔, 두려움, 감정은 평정심을 흔드는 것이다. 자연은 평정하다. 자연은 꽃이 핀다고, 꽃이 진다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리듬 전체에 대한 어떤 상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고대 철학은 왜 인간의 감정을 경계하고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약하다고 했을까?

 

우주의 이치를 깨치지 못한 경우 순간적으로 발생한 감정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붙들어 맨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감정을 자기라고 동일시한다. 순간적으로 발생했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인데 동일시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자기 허약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체 속에서, 이 순간의 마주침 속에서 이렇게 반응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대화한다.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거나 머릿속에 자신의 감정을 인과 짓는다. 그러면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뚜렸해진다. 그러나 그 감정이라는 것도 끝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증과 우울증을 반복한다.

 

4. 철학을, 공부를 하는 이유 - 통찰력, 항상성

 

철학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그 사건들을 관통하는 원리나 이치를 통찰하라고 한다. 통찰력이 없으면 매번 경험하고 그 경험을 그대로 흘러 보내고 반복하고 만다.

공부 킬링타임이 아니다. 공부를 힘들게 책을 읽고 시간을 내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정이다. 시간을 죽이려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 공부를 갖고 통찰력이 생길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철학은 국면, 국면 겪는 사건들을 바로 볼 수 있는 다른 시선,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지성의 힘이다.

어떤 철학도 감정을 중요하다고 하거거나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감정은 부정될 수 없으나, 원래 있는 것은 아닌데, 외부의 마주침, 장자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다. 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 동한다. 마음이 동해서 일어날 때 우리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그 기질과 맞으면 좋다고, 아니면 나쁘다고 여긴다. 지금 나에게 좋다고 그것만 느낀다. 잘해주면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이것만 본다. 이것은 통찰력이 아니다.

 

잎이 피었다고 좋아해. 이것은 봄만 본다.

잎이 질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통찰력이다.

겨울에 잎이 졌다고 슬퍼하면 통찰력이 아니다.

잎이 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통찰력이다.

 

그런 통찰력을 갖지 않으면, 마주침에 동하는 마음에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일희일비한다. 어떤 것을 겪을 때 아프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래서 아파하는 것이구나 하고 과거와 미래에서 그 아픔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아픈 것 때문에 동요되지 않는다. 감정적이라는 것, 휘둘린다는 것은 항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피는 지든 항상적이라는 것은 슬프다고 내일할 것을 하지 않지는 않는다. 인간은 계속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 항상적이지 않다. 공부란 항상성을 기르는 힘이다. 그 어떤 결과든, 어떤 마주침이 와서 어떤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그 속에서 일정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슬프다고, 기쁘다고 하는 것은 봄밖에, 겨울밖에 못 보는 것과 같다. 통찰력을 기르지 않으려면 공부를 왜 해? 스피노자든, 니체든, 장자든.

내가 겪는 마주침이 순간적인 것인데, 절대화하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지나가는 것이구나,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구나.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지성의 힘이다. 욕망과 감정을 고스란히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욕망과 감정을 이해하는 힘으로 지성이 작동한다. 시시각각 요동치는 욕망, 감정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감정에 의지하면서 한껏 슬퍼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또 불쌍히 여기는데, 이것은 기만적인 것이다. 슬프다고 정당화되지 않는다. 슬픔을 유지하려고 하고, 빠져 나오지 않으려한다. 스피노자는 슬픔이란 자기 역량을 약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연민이 작동하고 위로를 필요로 한다. 위로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잠깐 힘을 주는 마약, 비타민 같은 것이다. 위로를 니체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연민 자체 나빠서가 아니다. 연민은 많이 준다고 생각하고, 실은 고맙게 받지도 않는다. 순간적으로 의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서로의 약함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감정에 왜 벗어나지 못할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데, 순간적으로 의존한다. 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5. 장자가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뜻

 

덕충부 242페이지 ....

장자가 부정하는 감정은 감정 자체의 발생이 아니다. 해치는 것, 어느 때 감정이 우리를 해치는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지복은 감정적 차원이 아니다. 자신의 힘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잘해주었다고 해서 느끼는 기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의도했던 대로 되었다고 하는 기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다. 간지러움과 같다. 순간순간의 기쁨에 맞기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적인 것을 이해할 때 느끼는 기쁨이다. 장자의 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레임, 콩당콩당하는 것 ..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것은 금방 사라진다. 항성성, 통찰력이 없다면, 끊임없이 자극을 찾게 된다. 그런 유의 감정은 업시키는 것 같지만 금방 슬퍼지고, 심지어 두려워지고 그런 것이다. 도교수련자들이 제일 경계하는 것은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항상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 감정정인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정을 상실하는 것이다. 감정은 정의 소모, 에너지의 고갈을 가져온다.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자연의 도를 따르라. 자연의 순환, 자연은 잎이 진다고 슬프지 않다. 저야 피운다. 자연이 갖고 있는 항상적인 법칙은 모든 것과의 교제 속에서 피우고 떨어뜨릴 뿐이다. 자연은 잉여가 없다, 쓰고 다음으로, 또 쓰고 그 다음 스텝을 간다. 축적과 결여가 없다.

인간만이 결여와 잉여를 갖는다. 감정은 과잉과 결여 말고 있나? 공부는 모자라거나 넘치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게 한다. 외물에 대해 감정이 발생하더라도 붙들고 가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은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해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해소는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은 해소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면 그대로 받아야한다는 방식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해는 남김없이 비춘다. 니체, 해의 베푸는 덕이란 잉여 없이 베푼다.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 덕, 해가 햇빛을 비춘다고 말한다. 해는 100%로 준다. 꽃을 완전히 피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학문도 마음을 다 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결과는 투여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불행이 얼마나 기만적인가. 10의 노력을 했는데 1의 결과만 왔을 때 슬퍼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내 행위에 에너지를 잉여 없이 쏟으면 대가로 오는 것을 저절로 잊어버린다. 이것이 잊어버림이다. 자신의 행위역량이 본질이다. 뭐가 따라온 것은 중요하지 않다.

 

멋있는 구절 있다. 250페이지 10장 ......

 

우리는 자리에 연연하고 또 그 자리를 잃게 되면 자기가 부정되는 것으로 여기고 우울해 한다. 행복, 우울, 불행은 결과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데 슬퍼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데 제는 나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움을 통해 지성의 역량이 커지는 것이다. 장자가 아내의 죽음을 기뻐서 두드린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사건을 통해서 삶을 통찰하기 때문이다.

忘 잊는다. - 미래에 대한 기대의 투사를 하지 않은 것, 의도는 물론 결과도 잊는 것이다. 인정받기 위해 예술을 한다. 그러면 결과 때문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예술가는 그 사물과 마주쳐서 어떻게 다른 면을 어떤 색으로 그릴 것인가가 전부일 뿐이다. 다른 세계를 잊는 것은 바로 돈과 명예와 같은 세속의 가치이다. 의도함이 없다는 것을 알몸으로 보여 준 것이다. 비운 것이고 원초적이다. 장자의 예술 경지이다.

 

6. "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

열어구 활쏘기

우린 백척간두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번 똑같게 살고 있지 않은가. 평평한 땅에서 활을 잘 쏠 수 있다. 평지에서 그럭저럭 적당히 살 수 있다. 죽을지언정 더 이상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을 때 한 발짝 탁 내딛을 때에만 다른 세계가 열린다. 부처님의 “한 생각”! 돈, 부모, 신념 ... 꼭 붙잡고 있던 이런 것들이 없어졌을 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삶의 국면을 돌파하면서 지혜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지혜가 힘이 되어야 한다. 넓은 세상인 것 같지만 선승의 말처럼 송곳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 송곳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거기서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장자를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에서 보아야 한다. 비근한 것에서 통찰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제약도 없는 삶은 없다. 육체를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제약이다. 번뇌가 열반이다. 그 제약 안에서 어떻게 자유로울까. 돈이 있으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으면 당장 부자유이다. 그러나 아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생각한다. 의지와 노력이 무의미하다. 내 욕망과 일치할 때만 의지와 노력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정말 우리는 욕망하는 대로 이해한다. 지성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이 바꾸어지지 않는다. 장자는 비워라, 욕망을 버려라고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장자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하고 있다. 장자가 보여주는 이 통찰력을 우리는 다 버리고 있다.

1장 자연의 참된 본성을 잃지 않는다. 하늘처럼 텅 비어 있는 것 - 虛 어떤 것에도 응할 수 있다. 淸而容物. 거울과도 같이. 상에 멈추지 않는다. 비추고 사라질 뿐이다. 어떤 결여와 잉여가 없다. 마주하고 있을 때만 비추는 것이며, 붙들려는 의도가 없다. 2장 나아가고 물러날 때 의도함이 없기 때문에 때에 딱 맞는다. 어그러짐이 없는 것이 자에 들어맞는다. 자연의 이치에 맞는 것이다. 대학의 혈구지도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관계 마다 다양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3장 안회가 선생님을 따라할 수 있으나, 절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스승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 니체적일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장자적일 수 있다. 니체가 자기의 시대와 대면하는 방식을 우리는 배울 수 없다. 내 시대에서 질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 사유로서 질문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장자가 전국시대를 사유하고 넘어간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자기의 문제로 직면할 때만 돌파할 수 있다. 이러면 스승을 넘어 설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삶의 양식, 공자의 아우라는 모방 불가능한 것이다. 모방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워야 한다.

心死, 人死. 心이 단순히 마음은 아니다. ‘마음이 죽는다.’에서 마음을 감정으로 끌고 갖는지 잘 알 수 없으나, 마음이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응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죽으면 더 이상 무엇과도 마주칠 수 없다. 마음은 마주침 속에서 발생한다. 장자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무엇이다 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주희도 마음이 중요했다. 性도 마음이고, 情도 마음이다. 심통성정(心統性情). 그러나 마음이 감정은 아니다. 장자의 마음은 정신적인 것이다. 그 안에는 감정적인 것, 지성적인 것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이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과도 접촉하지 못하게 된다. 죽는데,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진다. 모든 존재는 해와 더불어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진다. 기다린 것이 있은 다음에 죽는다. 이것이 무엇일까. 주에도 설명이 없다. 생과 사가 무엇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무엇에 연하여 죽음과 생이 일어난다. 기독교 사유가 아니다. 단독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무엇과 연하여 나는 몸을 갖게 되면 과정 중에 있게 된다. 다른 존재를 따라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이 자력이 아님,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 수 없다. 시종을 알 수 없음. 생과 사를, 시작과 끝이란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디서부터 왔다. 이것이 초월적 사고다. 그러나 장자는 시작과 끝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를 이야기 한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다. 4장 공자가 노담을 만난다. 마른 나무는 심심해 보이는 것, 동요가 없는 것이다. 이 4장은 따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드디어 陰陽이 나온다. 주역과 연관된다. 자연의 법칙을 이야기 한다. 음기양기 이렇게 순환해서 만물이 생긴다. 이건은 장자의 존재론이다. 만물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氣로 이야기한다. 순환 운동이다. 동양은 생성의 철학이다. 뭔가 만들어내는 것은 운동, 작용이다. 밖에서 만들어내는 창조주가 없다.

交通成和, 서로 갈마든다.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 만물이 생겨난다. 가시적인 것은 아니다. 뭔지는 볼 수 없다. 그것 자체는 볼 수 없다. 도는 잠재력이다. 현실속에서의 잠재력이다. 영고성쇠, 만질 수 없으나 잠재력이 실체성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장자의 우주론이다. 생겨나는 것은 맹, 싹이 있다.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 있다. 생과 사는 단서가 없이 끊임없이 반전한다. 순환한다. 사는 생으로, 생은 사로. 始終相反乎無端而莫知乎其所竅 반은 대립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궁극의 끝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至美가 至樂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장 훌륭한 것은 이런 우주 속에 노니는 것이다. 노닌다는 것은 통찰력, 이 생과 사의 법칙성, 순환에 대한 통찰력이 서양은 매우 지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장자의 매력은 그 통찰력을 遊라고 하고 있다. 노닌다는 것은 체득한 것이다. 무의적 차원까지 아우른다. 의식됨 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至人 至樂이다. 맞다 틀리다가 아닌 통찰력 자체가 나의 삶, 욕망이고, 무의식이다. 이것이 遊가 아닌가.

이치가 무었이냐. 235 초식동물은 ...

늙고 헤어지고, 좋았다가 싫어지고, 또 만난다. 우리가 겪는 것은 小變이다. 소변이 항상성을 어그러뜨리지는 않는다. 니체 삶의 무구함을 긍정한다. 기독교도가 아님에도 불행이 오면, 왜 나에게만. 싫은 것을 벌이라고 생각, 좋은 것을 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벌도 아니고 상도 아니다. 무구하기 때문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이것이 大常이다. 비가 오거나 맑거나 이다. 그럼에도 무구한 세계를 무구한 채로 긍정하지 못한다. 의미를 부여하여 가치로 생을 가득 채운다. 천둥만 쳐도 두려워하게 된다. 무구성을 긍정하는 자는 큰 파고가 오면 삶이란 긍정 속에서 통찰한다. 또 작은 파도는 전체의 통찰 속에서 이해하고 넘는다. 자연의 법칙과 어긋나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희노애락이 침입하지 않는다. 좋다고 슬프다고 감정이 요동치게 만들지 않는다. 진흙에 빠진 채로는 벌레 하나도 구원할 수 없다. 자기 하나 구원하면 될 뿐이다. 연암의 一夜九渡河記! 집착할 때만 有爲를 하게 된다. 물에 대한 통찰- 가는 것뿐이다. 욕심이나 화복이 개입할 수 없다. 노예를 버릴 때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쥐고 있는 뭔가를 버릴 때 진흙처럼 버려야 한다. 통찰력이 있으면 소변이 나의 삶을 흔들지 않는다. 하루하루 변화가 없는 삶이 없다. 그런 항상성를 가지면 멋진 인생일 것이다. 선생님이 내 항아리 뚜껑을 열어주었다. 천지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노애공 이야기 - 안과 밖이 일치하는 사람이란 참으로 드물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맡겨도 된다. 241페이지 백리해, 젊을 때 녹봉이, 늙었을 때 사생이 침입한다. 이런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 돈을 벌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우리 무의식을 너무도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적절한 경제적 조건 이 초기조건을 포기할 수 없는가? 나에게 없는 어떤 것- 밖에 있는 것이 나를 흔든다면 또 그렇게 흔들리면서 산다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있고 없고는 자유와는 무관하다. 遊가 自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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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9 00:39
    강석쌤 드디어 모래주머니를 벗어 던지셨군요! 에세이를 한 편 쓰신 거 같아요ㅠㅠ

  • 2017-11-08 23:34
    강석샘! 동사서독의 천군만마.^^ 샘의 첫 에세이가 기대됩니다~~